1936년 작가 루쉰(魯迅)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인 이육사는 조선일보에 추도사를 실었다. “아! 그가 벌써 56세를 일기로… 영서하였다는 부보를 받을 때에 암연 한줄기 눈물을 지우니 어찌 조선의 한사람 후배로서 이 붓을 잡는 나뿐이랴.” 루쉰은 생전에도 저항적 지식인의 표상과도 같은 존재였고 1990년대 이후에도 국내에 100여 종의 관련 서적이 출간될 정도로 그 관심은 뜨겁다.

루쉰 연구가인 린시엔즈(林賢治)가 2004년 중국에서 출간한 이 평전은 번역본만 1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저자는 미화의 베일을 걷어내고 루쉰의 삶과 고뇌 속으로 곧장 파고든다.

저우수런(周樹人·루쉰의 본명)은 1881년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으나 집안이 기울자 ‘도련님’에서 ‘밥 빌어먹는 아이’로 전락한다. 고생스런 어린 시절을 겪은 그는 난징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02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이제 그는 혁명아였다. “중국은 물질을 숭상하고 천재를 멸시해 왔다. 개인의 개성조차 모조리 박탈된 이 병이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1909년 고향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수업할 때 책을 펴는 법이 없었고,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학생은 인간이지 수동적인 기계가 아니므로 생각할 기회를 많이 줘 창조성을 키우려 했던 것이다.”

신해혁명 후 교육부 관리로 일하던 그는 신문화운동의 거센 파도 속에서 1918년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신청년’에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발표한다. 수천 년 동안 개인이라는 나약한 존재가 세상의 잔혹함과 허위 속에 스러지는 것을 그는 ‘식인’에 빗댔다. 1921년 무수한 은유들로 구성된 2만 자 분량의 ‘아큐정전’을 발표하자 반향은 컸다. “소심한 정객들과 관료들은 이 작품이 자신을 풍자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세상에 초연한 문필가가 아니었다. ‘싸움닭’이었다. 국민당 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중국좌익작가연맹에 참여하면서도 연맹 내부의 독선을 비판했다.

급진적 혁명문학 그룹인 창조사·태양사 등이 그를 ‘천박한 인도주의자’라고 공격하자, 루쉰은 “혁명은 혁명가가 마음대로 힘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혁명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사람을 다 살리는 것”이라고 맞섰다. 그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고 적당한 타협이란 몰랐다. 따라서 그의 전기는 어두운 시절 지식인의 꼿꼿한 삶에 대한 교범이 된다.

20권짜리 ‘루쉰 전집’의 축약판이라 할 만큼 방대한 자료를 망라하고 시대적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탁월한 평전이다. 그러나 저자의 루쉰에 대한 집착과 사상적 편벽은 지나친 감이 있다. 묘사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의도적으로 포기한 서술 탓에 비판적 책읽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