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웅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

만화 '고우영 삼국지'의 한 대목. 조조를 토벌하자는 비밀 연판장에 서명하던 유비는 '조조가 황제를 잡아먹도록 놔두는 것도 방편이 될지도 몰라…'라고 중얼거린다. 여기서 작가는 돌연 이렇게 직접 개입한다. "아유! 저 봐! 저 작달막한 친구의 배포를 봐라! 세상을 다 먹어버릴 야심을 숨기지 않았나!"

원본 '삼국지(三國志·삼국지연의)'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대목은 충의(忠義)라는 유교적 추상 관념에 갇혀 있던 '삼국지' 인물의 실체를 폭로한다. '충의'란 세상에 내세우는 도구일 뿐, 본심은 어디까지나 천하의 패권을 잡는 데 있다는 것.

1978~1980년 스포츠신문에 연재돼 수많은 한국 성인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고우영(高羽榮·1939~2005) 화백의 만화 '고우영 삼국지'를 '서사(敍事) 텍스트'로서 정식 문학평론의 대상으로 삼은 학술 논문이 나왔다. 정호웅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문학평론집 '한국의 역사소설'(역락 刊)에 실은 논문 '고우영 삼국지와 삼국지의 서사 변환'을 통해 " '고우영 삼국지'는 국내에 나온 다른 판본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삼국지' 재창작의 가장 모범적인 예"라고 말했다.

▲ 만화 '고우영 삼국지'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학술 논문을 발표한 정호웅 홍익대 국어교육과 교수./유석재 기자

"영웅들의 숨어있는 욕망을 파고들어 현실적으로 재창조 인물들 사이의 경쟁심리에 주목해 '대결 심리학' 만들어 유가적 이념에 은폐돼 있던 성욕, 긍정의 세계로 끌어내"
 
정 교수는 "고 화백 별세 직전, 검열에 걸려 훼손된 부분을 되살려 낸 10권짜리 복간본(애니북스 刊)을 최근 보고 이 만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우영 삼국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삼국지' 특유의 윤리적 이분법과 영웅서사를 해체한 데 있다고 분석했다. 인·의·충·신 같은 유가적 가치의 표상으로 추상화돼 있는 '삼국지' 인물의 성격 안쪽으로 파고들어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을 밝혀내 현실적 존재로 재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리샤오룽(홍콩 무술영화배우)에게 도전했을까? 아니면 이노키(일본 프로레슬러)에게 도전했을까? 장비의 스파링은 계속된다"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뒤섞는 기상천외한 방식과 함께 독자가 등장인물에 동화되는 것을 막는 '소격(疏隔·거리두기)의 서사'를 만들어냈다는 설명이다.

‘고우영 삼국지’는 또 인물들 사이의 경쟁심리에 주목하는 ‘대결의 심리학’을 만들어 냈다. 원본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관우가 조조를 놔 주게 해서 의기를 세워 주자’고 점잖게 말하지만 고우영 만화는 “관우는 두고두고 내게 경쟁의식을 부릴 터인즉 이번 기회에 기를 꺾는다”는 제갈량의 계산을 방백으로 집어넣는다. ‘저 친구한테만은 질 수 없다’는 현대인의 미묘한 경쟁 심리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몰래 책을 뒤적거린 가장 큰 이유였던 ‘성적(性的) 욕망의 긍정’도 ‘고우영 삼국지’의 큰 특징이다. 여포를 ‘배신자’라는 기호에서 끌어내 한 여성(초선)을 간절하게 욕망한 인간으로 새롭게 그려내는 등, 유가적 이념으로 성욕을 은폐하는 인식론에 갇혀 있던 기존의 ‘삼국지’와는 다른 지평으로 나아갔다는 설명이다. “ ‘고우영 삼국지’야말로 앞으로 무수히 이뤄질 ‘삼국지’의 창조적 변용 작업을 이끄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