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정자<사진>에겐 40여년 연기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9일 밤 9시40분 서울 정동극장 분장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연출 박정희) 개막 공연을 막 끝내고 분장을 지운 박정자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반창고를 붙인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왼쪽 다리엔 보조기를 차고 있었다.
이날 개막 무대에서 그는 1막엔 대사를 자주 놓쳤고, 2막엔 아예 대본을 들고 나와 곁눈질하며 연기했다. 박정자 연기 인생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정자는 8일 밤 늦게 연습을 끝내고 귀가하던 중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입 안이 터져 다섯 바늘을 꿰맸고, 인중(人中)도 찢어져 성형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는 진통제를 맞고 1막 무대에 올랐다. 그 진통제는 그러나 기억력을 떨어뜨려, 2막엔 대본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커튼콜 후 상대역인 배우 손숙이 “박정자 선생이 얼굴과 팔다리를 다쳐 공연을 못할 정도였는데 이렇게 나오셨다”며 관객의 양해를 구했다. 배우의 투혼에 400여명의 관객은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박씨는 공연 후 기자에게 “진통제 때문인지 대사가 통 기억나질 않았다”고 털어놨다.
수녀가 갓 낳은 아기를 탯줄로 목 졸라 죽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신의 아그네스’는 박정자와 손숙이 15년 만에 다시 연기 경쟁을 벌여 개막 전부터 화제가 된 작품이다. 손숙은 “어떻게 공연이 끝났는지 모르겠다. 이게 배우의 인생”이라며 눈물을 비쳤다. 극단측은 공연이 앞으로도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