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조선일보사 정치부

한 고등학교 과학과목에서 수강생 138명 중 134명이 공동 1등을 한 내신 자료가 공개됐다. 변별력 있는 시험으로 제대로 실력을 가릴 경우, 진짜 1등은 1명일 뿐이다. 기형적인 입시제도에 따른 내신 부풀리기가 1등짜리를 133계단이나 하향 평준화시킨 것이다. 과학에 상당한 재능이 있는 이 학생은 공부할 이유가 없다. 100등은 뒤에 있어야 할 학생이 자신과 똑같은 평가를 받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마다 수백명의 일등을 만들어 낸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은 것일까. 이제는 대학들마저 도토리 1등으로 키를 맞추자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 이른바 서울대 폐지론이다. 전교조 사이트에 올라있는 '공교육 종합개편안'은 "대학서열 체제를 무너뜨려 대학평준화를 실시하는 것만이 공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소수 권력집단의 생산소로 전락한 서울대 개혁의 첫 번째 단추는 서울대 졸업장을 주지 않는 것"이라며 전국 국공립대학을 같은 시험으로 뽑고, 졸업할 때도 똑같은 학위를 수여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선 1등 없는 사회 만들기 캠페인이 진행 중이다. 1등들을 향해 "너희가 앞서 가는 것은 반칙과 특권 때문"이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라"며 뒷덜미를 잡아챈다. 그리고 그것을 개혁이라 부른다. 신문시장 1등의 판매 부수는 전체의 30%를 넘으면 안되고, 1, 2, 3등을 합쳐 60%를 넘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법안을 추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어찌보면 예견됐던 일이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뒷받침한 강력한 엔진 중 하나가 반(反)엘리트, 평등주의 정서였다. 노 대통령 스스로도 "엘리트주의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를 가장 쉽게 설명했다는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라는 책은 미국 NBA 농구를 예로 들며 "앞으로는 1등 독식(獨食)의 시대"라고 말한다. 시카고 불스팀의 수퍼스타 마이클 조든의 1998년 연봉은 8000만달러로, 같은 팀 2진급 선수의 연봉 27만달러의 300배였다. 그러나 동료 선수들은 조든의 높은 연봉을 불평해선 안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조든이 14년간의 선수생활 중 파급시킨 경제효과는 그의 연봉의 120배인 100억달러 규모며, 조든이 없었다면 2진급 동료는 27만달러 연봉도 챙기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다. 국내 일등기업 삼성전자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20%, 초봉 2000만원이 넘는 괜찮은 일자리 창출의 20%를 떠맡고 있다. 올 들어 9월까지 영업이익이 10조원을 돌파했고, 작년 국내 세수(稅收)의 7%가 삼성전자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삼성전자에 대해 "불공정한 시장질서 때문에 1등이 됐다"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다른 2등 기업들과 줄을 맞추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경제위기는 지금보다 훨씬 악화됐을 것이고, 한마디로 아찔한 일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1등인 것은 배 아픈 일이다. 그래서 1등 때리기, 1등 딴지걸기는 당장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다. 그러나 1등 없는 학급은 머지않아 전체 꼴찌반으로 전락하고 만다. "혼자 1등해선 안된다"며 수십명, 수백명씩 보조를 맞춰 걷게 하는 나라가 어떻게 광속(光速)으로 경쟁하는 속도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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