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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배스(bass)’의 이름은 익히 들어보셨을 겁니다. 미국산 물고기로 우리나라의 강과 호수, 연못에 완벽하게 적응한 뒤 토종 생태계의 씨를 마르게 하는 악마 고기로 유명합니다. 배스·블루길만 따로 잡아들이는 낚시대회도 여는 등 여러 차례 퇴치 작전에 나섰지만, 결국 토착화를 막지 못했죠. 우리 토종 물고기 가물치가 미국으로 퍼져가서 현지 생태계를 파탄내는 ‘대리 복수전’을 지켜보면서 일말의 만족감을 느낀 분들도 있을 겁니다. 왕성한 먹성과 만렙의 적응력의 화신 배스, 그런데 요즘 이 녀석들의 고향 미국에서 심상찮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버지니아주 자연보호국 사람 손에 잡힌 배스의 몸에 정체 불명의 검은 무늬가 또렷하다.

배스의 몸 곳곳에 숯검댕이 같은 자국이 생겨나는 괴질이 지난해부터 급속도로 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야생동물자원국은 최근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얼룩덜룩 배스 증후군(Blotchy Bass Syndrome)에 걸린 물고기들’이라며 사진 넉 장을 공개했습니다. 각 배스들마다 마치 먹을 갈아서 몸통에 붓으로 칠을 한 것처럼 제각각의 검은 무늬가 있었습니다.

/버지니아주 야생동물자원국 사람 손에 잡힌 배스의 몸통에 정체 불명의 검은 무늬가 뚜렷하다

BBS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새입니다. 언젠가부터 잡히는 배스가 숯검댕이를 갖다댄 듯 몸통색이 이상하다는 스포츠낚시꾼들의 신고가 잇따랐다고 합니다. 이에 연방정부 기관인 지질조사국(USGS)이 대학 연구소, 스포츠낚시업체 등과 협업해서 심층 조사에 나섰죠. 멀쩡한 물고기몸통에 시커먼 반점이라니, 마치 멀쩡한 몸뚱이에 드리워진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 같은 으스스한 느낌도 안겨줍니다. 저승반점이라고도 부를만하죠.

/버지니아주 야생동물자원국 사람 손에 잡힌 배스의 몸통에 정체 불명의 숯검댕 무늬가 선연하다.

연방 정부와 각 연구기관들이 나서서 표본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나온 결론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유해한 병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선 인체나 애완동물에게 악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숯검댕 무늬를 했다고 해도 싱싱하고 건강한 배스라면, 요리해먹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요.

/버지니아주 야생동물자원국 사람 손에 잡힌 배스의 몸통에 정체 불명의 숯검댕 무늬가 또렷해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증폭되고 있습니다. 미국 곳곳에서 숯검댕 무늬의 배스가 발견되고 있는데, 이 숯검댕 무늬가 어디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거든요. 인류사를 뒤바꿔놓은 대표적인 괴질들도 처음에는 물음표에서 시작됐으니까요.

/미 지질조사국(USGS) 미 지질조사국은 최근 주요 연구기관 및 기업들과 손잡고 정체불명의 숯검댕이가 왜, 어디서 오고 있는지 기원을 찾고 있다.

우선 이 숯검댕이 배스도 멜라니즘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멜라니즘은 어떤 이유로 피부에 멜라닌 색소가 지나치게 많이 만들어지면서 동종에 비해 확연히 검은 색을 한 개체가 출연하는 것을 말하죠. 멜라니즘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블랙팬서, 흑표입니다.

/버지니아주 최근 미국의 다른 주로 서식반경을 넓혀 토종 생태계를 파괴하고 다른 배스들과 교잡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퇴치 1순위가 됐다.

숯검댕 무늬가 인체와 다른 동물에 무해하다는 것도, 어종 자체에 치명적이지 않다는 것도,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어쩌면 본격적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잠복기를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더 피셔리스 블로그 일러스트로 나타낸 숯검댕이 배스

‘숯검댕이 배스’의 출현에 미국 전역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은, 배스가 단지 정겨운 토종(미국인들 입장에서) 물고기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배스는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스포츠 낚시 어종으로, 이와 관련한 산업 규모도 상당하거든요. 배스 몸에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시커먼 무늬가 치명적 병변으로 돌변했을 때, 미국의 레저산업이 단박에 기우뚱 할 수 있다는 불길한 상상도 결코 섣부른게 아닙니다. 특정 동물군에게 나타나는 증세에 인간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것은 인간으로의 전염 가능성이니까요.

배스는 대표적인 외래 생태교란종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본고장’ 미국에서조차 생태교란종 취급을 받고 있어요. 다른 주(州)가 원산지인 배스가 흘러들어와 토착 포식자로 군림하는 걸 ‘외래종의 습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죠. 가령 버지니아주에서는 남부가 원산지인 앨라바마 배스가 퇴치1순위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이 지역 수중 생태계의 최강자 큰입배스를 끌어내렸고, 또 다른 토종 작은입배스와 점박이배스와 잇따라 교잡하면서 혈통을 흩뜨리고 있기 때문이죠. 반면 큰입배스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서 강줄기를 통해 유입된 뒤 이 지역 토종 생태계를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캐나다 당국의 ‘퇴치 1순위’가 됐습니다. 천성이 ‘생태계 교란’인 놈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일까요? 배스를 뒤덮고 있는 정체불명 숯검댕의 정체가 어떻게 밝혀질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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