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드는 호젓한 아프리카 사바나의 덤불. 두 황토색 몸뚱아리가 밀착해있습니다. 백수의 왕 사자입니다. 다리와 다리를 포갠채 얼굴을 밀착하고 있고 서로의 눈빛에서는 말 그대로 당도 100퍼센트의 꿀이 줄줄 흐릅니다. 거친 얼굴을 서로에게 부비며 먼 곳을 한 눈으로 응시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이 끝나는 그날까지 함께하자고 맹세하듯 말이죠. 이 장면에 맞춰 월트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온킹’의 주제가 ‘오늘 밤 사랑을 느낄 수 있나요(Can You Feel The Love Tonight)’가 흘러나오면 제격이겠습니다. 오아시스에서 하룻밤새 돌무더기로 장성을 쌓을듯한 기세로 서로를 탐닉하던 암수사자의 농염한 애정신에 흘러나오던 러브테마였죠. 아, 그런데 이 사자들, 자세히 보니 ‘라이온킹’ 애정신과는 조금 다르네요.

벨기에의 사진작가 Nicole Cambre가 보츠와나에서 촬영해 유명해진 2016년 사진. 갈기가 성성한 수사자 두 마리가 바짝 붙어앉아 친밀함을 과시하는 모습이다. /Nicole Cambre. CGTN Africa Twitter

서로 밀착해서 몸을 부비는 두 마리 모두, 갈기가 성성한 수컷이거든요. 백수의 왕 중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수사자들간의 진한 스킨십이 최근 몇년새 화제입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의 확산과 기기의 발달로 사파리 관객들 각자가 동영상 촬영가로 활약하게 되면서 생겨난 현상입니다. 약육강식의 뻔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 특별한 장면을들 찾는 관람객들에게 수사자들의 질펀한 애정행각만큼 흥미로운 볼거리가 없거든요. 고독한 방랑생활을 하는 수컷 동물들끼리의 강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코끼리나 얼룩말도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사자는 그 유대관계의 표현이 유달리 격한 스킨십과 애정 표현으로 발현되는 편입니다. 심지어는 암컷과 수컷간 짝짓기에만 보이는 몸동작을 구사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사자도 암컷과 수컷간의 이성결합이 아닌 다른 방식의 연애를 즐기는게 아니냐는 추측도 잇따랐죠.

수사자들이 밀착해 애정을 과시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번식기 암컷과의 짝짓기를 연상시키는 경우까지 있다. 이런 습성을 두고 무리 구성을 위한 친밀감 구축 혹은 서열 싸움 등의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Rob The Ranger Wildlife Videos Youtube

만화·뮤지컬·실사영화로 여러 번 변주된 ‘라이온킹’을 비롯해 여러 편의 자연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사자는 고독하고 권위주의적며 가부장적인 투쟁의 동물이라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대중들에게 굳어져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도 수사자들간의 유난한 스킨십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지 다양한 차원에서 연구가 진행중이고 여러 이론들이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워싱턴포스트 신문은 ‘이 껌딱지같이 붙어있는 사자들은 수컷이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연인이라는 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수사자들의 유난스러운 스킨십의 원인을 추론했습니다. 아프리카 사자 연구자인 미네소타대학의 크레이그 패커 교수는 “그건 브로맨스다. 브로크백마운틴(아카데미상을 받은 퀴어무비)이 아니다”라고 단언합니다. 남자들의 진한 의리와 우정의 측면에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영화로 치면 조폭 캐릭터가 나와 ‘브라더~’를 이치던 영화 ‘신세계’의 구도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패커 교수는 “사자들의 습성은 ‘라이온킹’을 통해 통상 알려진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부연합니다. 한마리의 수컷이 여러마리의 암컷을 거느리며 사진만의 왕국(프라이드)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는 여러 수컷들끼리 연합군을 결성한다는 것입니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절대 강자가 아닌 이상, 왕국의 구축 과정에서 협업은 필수라는 것이죠. 이렇게 연합군을 형성해야 사바나 패권을 넘보려는 다른 세력에 맞서는데 효과적입니다.

벨기에의 사진작가 Nicole Cambre가 보츠와나에서 촬영해 유명해진 2016년 사진. 갈기가 성성한 수사자 두 마리가 바짝 밀착해 사바나를 산책하면서 애정을 자랑하고 있다. /Nicole Cambre. CGTN Africa Twitter

이렇게 자신들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기위해서는 우선 친밀해야겠죠. 그 연장선상에서 이 같은 스킨십을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죽고 못살 듯 꼭 붙어있는 수사자들이 두 마리, 혹은 서 너마리 이상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둘씩 셋씩 짝을 지어서 함께 몸을 맞대고 뒹굴면서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죠. 사파리 가이드들은 대개 이런 현상을 ‘사회적 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다(Social Bonding)’고 소개합니다. 반면 이 같은 행동을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의 관점에서 볼 필요도 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유명 동물 연구자는 “일부 원숭이들의 습성과 견줘 생각할 여지도 있다”는 의견도 제시합니다. 일부 원숭이 종류에서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수컷들이 힘이 약한 수컷들에 대해서 위세를 과시하는 차원에서 번식을 할 듯이 신체적으로 밀착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죠. 암수를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자들도 겉으로는 끈끈한 스킨십을 보이지만,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내 분석해보면, 굴복시키려는 자와 굴복당하는 자의 동작과 표정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숫사자 두마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다. /Great Massai Mara Photo

어떤 해석이든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려 들면 곤란하다고요. 동물의 사고·행동방식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을 광활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백수의 왕중의 왕, 수사자로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살벌하고 고달픈 일이라는 것이죠. 아무리 연합군을 결성해서 프라이드를 이룬다고 해도 하늘아래 태양이 두 개 이상일 리는 없는 법입니다. 결국 최후의 1인이 프라이드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패자는 처참하게 쫓겨납니다. 이들은 권토중래를 하거나, 혹은 자신만의 왕국 건설에 나서지만 어느 하나도 쉽지 않습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왕의 씨를 이어받아 한 배에서 태어난 수사자들이라도 어른이될 때까지 우애가 이어지는 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조폭을 연기한 황정민의 '부라더~'라는 대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영화 '신세계 '. 수사자들의 격정적 스킨십은 브로맨스를 가장한 권력 위압의 산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조선닷컴

그러니 라이온킹에서 왕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서 잔학한 음모까지 꾸며대는 악당 사자 스카를 탓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왕의 씨를 타고 났으나, 왕이 되지 못하는 그 순간 목숨이 경각에 달릴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우두머리가 아닌 수사자는 조선왕조의 종친들과 빼닮은 숙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치열한 왕위찬탈혈투 중에 얼마나 많은 종친들이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나요. 이 중에는 권력을 일찌감치 등지고 평범하게 살아가려 했으나, 그저 왕의 피를 타고났다는 이유로 온갖 모함과 음모에 휘말려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습니다. 프라이드에서 세력을 놓친 수사자들처럼요. 이래저래 사람세상이든 짐승세상이든 우두머리로 살아간다는 것은 살벌하고 위험천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