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은 연일 국익·실용 외교를 강조하고 있지만 여권(與圈) 안팎에선 이른바 ‘자주파·동맹파’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정부 출범 초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부 장관엔 위성락·조현 등 동맹파 인사를,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에는 이종석·정동영 등 자주파 인사를 각각 임명해 자주·동맹의 양손 외교·안보 정책이 펼쳐질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동맹파의 대미 외교가 관세 협상에서 암초를 만나고, 자주파는 대북 확성기 철거, 한미 연합 연습 축소·연기 등 온갖 대북 유화책에도 북한으로부터 냉대와 무시를 받으며 대북 대화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양측 간 불만이 커지는 모양새다.

자주·동맹 갈등설은 지난달 26일 더불어민주당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세미나에서 표출됐다. 선공은 자주파에서 시작됐다.

대표적인 자주파 인사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세미나에서 “대통령이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붙드는 세력이 지금 정부에 있다. 소위 동맹파들이 너무 많다”며 외교 안보 팀 개편을 주장했다. 외교관 출신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조현 외교부 장관 등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됐다.

더불어민주당 정세현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이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세미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5.09.26 /남강호 기자

정 전 장관은 “이거 미국이 싫어할 텐데요, 미국이 싫어한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있다. 이렇게 되면 ‘문재인 정부 시즌2’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 전 대통령은 4·27 판문점 선언 등 좋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못 했다”며 “대통령 주변에 소위 자주파가 있으면 앞으로 나간다. 동맹파가 지근 거리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부터 등장한 용어인 자주파는 남북 공조를, 동맹파는 한·미 동맹을 중시하는 정권 내 그룹을 말한다. 현 정부에선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 등이 자주파로 평가된다. 정 전 장관도 과거 자주파로 분류됐다.

정 전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연설에서 남북 관계 해법으로 제시한 ‘END 이니셔티브’도 강하게 비판했다. END는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의 약자로, 이 대통령은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대화로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 공존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야 한다”고 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핵 동결 조건이나 방법론을 대통령이 말하게 해야지 비핵화 얘길 왜 넣나. 대통령 끝장낼 일 있느냐”고 했다. 북한 당국이 거부하고 있는 비핵화를 대북 정책 구상에 넣은 것은 잘못됐다는 취지로 보인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한 호텔의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 전 장관의 이 같은 ‘동맹파’ 공격성 발언이 나오자 불과 하루 만인 27일 위성락 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E.N.D의 E는 ‘교류’고 N은 ‘(관계) 정상화’고 D는 ‘비핵화’”라며 “어디서 제안됐는지 궁금할 텐데 사실은 이 제안은 통일부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통일부 제안이 대통령실에 올라와서 저희가 그 틀을 그대로 받고 조금 수정을 가했다”는 것이다.

정 전 장관이 E.N.D 정책이 동맹파의 것으로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을 어렵게 만든다는 취지로 비판하자, ‘동맹파’인 위 실장이 그건 통일부 아이디어라고 반박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통일부 정동영 장관은 정 전 장관, 이종석 국정원장 등과 함께 자주파 주요 멤버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북한의 2국가론과 남북기본협정 추진 방향' 세미나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뉴스1

앞서 정 장관은 지난달 24일 비공개로 열린 고위 당정협의회에서 “대통령실 NSC에 외교부와 국방부 출신의 안보실 차장 등은 빠져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직업 외교관, 군 장교 출신들은 동맹파적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NSC에 참석하면 자주파는 소수 목소리가 돼 밀린다고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역시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강조하는 조현 외교부 장관은 4일 언론 인터뷰에서 ‘동맹·자주파 논란’에 대해 “그건 20년 전 프레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동맹파·자주파는 없고 국익파·실용파만 있다”고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동맹·자주파 논란이 점점 불거지자 조 장관이 수습하는 차원의 발언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관세 협상 난항으로 여권에서 반미 정서가 커지고 있어 자주파(이종석·정동영)의 동맹파(위성락·조현) 공세가 더 노골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민주당 강성 친명(친이재명)계 원내외 인사의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는 최근 ‘3500억달러 현금 선불 요구, 트럼프 정부는 한국을 파산시키려는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고 “무도한 관세 협상으로 국민 주권을 훼손하는 미국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