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섰다. 반미·반서방 성향이자 핵전력을 보유한 북·중·러 지도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김정은은 열병식 이후 북·러 정상회담도 했다. 회담에서 두 정상은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을 언급하며 ‘혈맹’ 관계를 확인했다. 푸틴 대통령은 “당신의 주도로 북한 특수부대가 우리의 새 협정에 완전히 부합하게 쿠르스크 해방에 참여했다“며 “당신의 장병들은 용감하고 영웅적으로 싸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북한군과 가족들이 겪은 희생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북·러는 지난해 6월 푸틴 방북 시 양국 중 한쪽이 전쟁 상태에 처하면 다른 쪽이 군사 및 기타 지원을 한다는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협정에 따른 파병이었다고 분명히 하는 발언이었다.
김정은도 “우리는 협정의 틀 안에서 이 협정에 따른 의무로 러시아 국민·군대와 함께 싸웠다”며 북·러 간 조약을 언급했다. 또 “내가 당신과 러시아 인민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도울 것”이라며 “이는 형제의 의무”라고 했다. 북·러 정상회담은 지난해 6월 평양에서 열린 이후 1년 2개월여 만이다. 2시간 30분간 회담한 두 정상은 포옹하며 헤어졌고, 푸틴은 “(모스크바에) 오시라”며 김정은을 러시아로 초청했다.
김정은은 이번 방중을 통해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러시아 편중 외교를 해소하고 대중 관계를 복원하려 할 것으로 분석된다. 러시아와는 안보, 중국과는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일종의 ‘중·러 균형 외교’를 구사하려 한다는 것이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러시아 파병 후 김정은이 러시아가 군사적 도움은 될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 생각보다 얻는 것이 많지 않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이날 천안문 망루에 시 주석과 나란히 선 것도 북·중 관계 회복을 상징하는 장면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정은은 이번 방중 기간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핵 개발에 반대해 왔다. 하지만 신봉길 한국외교협회장은 “김정은은 중국과 러시아에서 ‘북한은 핵보유국’이라는 인정을 받는 효과도 누리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이번 전승절 참석을 대미 협상 발판으로 삼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김정은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였던 2018년과 2019년에도 미·북 회담 직전 중국을 찾아 시 주석과 만났다. 이번에는 김정은이 중국과 러시아를 모두 뒷배 삼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상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방중 직전 미사일총국 산하 연구소를 방문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역량을 자랑한 것도 미·북 정상회담을 염두에 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한석희 연세대 교수는 “김정은은 ICBM 공개, 전승절 참석, 북·중·러 연대 등을 통해 대미 협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있다”면서 “2019년 하노이 협상 결렬 이후 빗장을 걸어 잠근 김정은이 이번에 다자 무대에 과감하게 등판한 것은 대미 협상에 대한 자신감을 보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한·미·일이 요구하는 ‘북한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핵 군축 협상으로 판을 바꾸려 한다는 분석이다.
중국이 미·중 전략 경쟁 구도 속에서 한·미·일에 맞서 북·중·러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내달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 전격 참석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통일연구원 홍민 선임연구위원은 “시 주석이 답례 형식으로 북한 열병식 참석을 위해 방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중국은 10월 말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이전에 북·중 관계를 과시해 한·미를 압박하려고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