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인상 여파로 국제 정세가 격랑에 휩싸인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이달 중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한 미국·일본·러시아 주재 대사 등 특임 공관장 30여 명을 모두 귀임시켰다. 그 결과, 지난 1월 정재호 대사 귀국 이후 공석인 주중대사관을 포함, 한반도 주변 4강에 한국 대사가 없는 초유의 사태가 계속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유엔 대표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UAE, 헝가리 등에 주재하던 대사들도 귀국했지만, 후임 대사를 내보내지 않아 외교 공백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으로 미국 및 주요국의 관련 정보 입수가 중요한 시점에 4강 대사를 동시에 비워두는 것은 국익에 치명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지난달 말 조현동 주미 대사, 박철희 주일 대사,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 황준국 주유엔 대사 등에게 “7월 14일까지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이들 외에도 윤여철 주영국 대사, 문승현 주프랑스 대사, 김진한 주이스라엘 대사, 류제승 주UAE 대사, 홍규덕 주헝가리 대사 등도 교체 대상에 포함돼 귀국했다. 진창수 주오사카 총영사, 김의환 주뉴욕 총영사, 이서영 주호놀룰루 총영사, 이범찬 주두바이 총영사 등은 18일까지 귀국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이재명 대통령이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특임 대사들의 조기 귀국을 지시했다”며 “외교부는 중요한 시기에 대사들의 공석을 우려했지만,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통상 정권이 바뀔 경우, 신임 대통령은 전 정권이 임명한 특임 대사들의 교체를 위해 후임자의 아그레망(임명 동의)을 신청한 뒤 순차적으로 교체해 왔다. 따라서 정권 교체기에도 4강 대사가 한꺼번에 동시 공석인 경우는 없었다.
이재명 정부처럼 인수위 없이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조윤제 전 주영 대사를 주미 대사로 내정한 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명한 안호영 주미 대사가 5개월간 더 근무해 같은 해 10월 귀임토록 조치한 바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된 특임 공관장들을 일괄 귀국시켰다. 당시 이 같은 지시가 외교부에 내려간 시점은 조현 외교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 청문회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을 때였다.
◇미국과 관세 협상 중 주미 대사 부재
외교 안보 현안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해외 공관장 30여 명의 부재는 즉각 우리 외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25% 관세 인상 움직임, 주한 미군 역할 변경 등 주요 외교 현안이 맞물린 시점에서 주미 대사가 없는 것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현지에서 쌓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정보 수집 및 협상 전략을 수립해야 할 주미 대사가 없어서 트럼프 정부의 인사들과 협상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 전문가들의 모임이나 한미 협상 관련 기사의 댓글에서는 “정권 교체 논리로 외교 연속성을 단절시킨 것은 중대한 실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북한이 참전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도훈 주러시아 대사를 불러들인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신임 대사가 새로 나가기까지 최소한 1~2개월이 걸릴 텐데 그동안 정보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철희 주일 대사는 이 대통령 취임에 따른 한일 협의, 관세 대응, 양국 전문가 회의 등을 위해 이달 말까지 주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진창수 주오사카 총영사는 오사카 엑스포의 ‘미국의 날’과 ‘중국의 날’ 참석 요청을 받았지만 “18일까지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아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대통령의 조기 귀임 지시로 귀국한 A 대사는 “정권이 바뀌면 후임자가 내정된 상태에서 수개월 내에 귀국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통보받고 2주 만에 귀국할 줄은 몰랐다”며 “상대국에 후임자를 소개할 기회조차 없어서 유감”이라고 했다.
◇아그레망 절차 진행 안 돼
정부는 29일 현재 미·일·중·러 4강 대사에 대한 아그레망을 요청하지 않은 상태다. 다른 국가에 파견할 대사에 대해서도 아그레망 절차가 진행 중인 것이 없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번에 귀임시킨 공관장들의 후임을 모두 임명하기까지는 최소한 1~2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외교부 차관 출신의 전직 외교관은 “국가를 대표하는 재외공관장이 주재국에서의 임무 완료에 따른 절차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으며 신임 공관장 임명에 시간이 상당히 걸리기에 이로 인한 외교 공백이 걱정된다”고 비판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한 특임 대사를 외국에 더 둘 수 없다는 이유로 국내 기관장 인사하듯 처리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의 특수성과 연속성보다는 국내 정치 논리에 따라 공관장 인사를 처리했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6월 4일 취임 후, 한 달 넘게 윤석열 전 정부의 장관들과 국무회의를 함께 하며 국정을 협의했다. 국내 문제에서는 이 대통령이 내세우는 실용주의를 접목시켰는데, 특임 공관장 문제는 다르게 인식, 외교 공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대사들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며 “이재명 대통령은 실용 외교를 한다고 했는데, 특임 공관장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비실용적이고, 비효율적인 외교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