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 초대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경영 철학에 따라 1977년 방위산업회사 ‘삼성정밀공업’을 설립했습니다.
1960·70년대는 대내외적 위기였습니다. 베트남 전이 발발했고, 5만명의 국군이 파병됐습니다. 단기 체류 병력까지 포함하면 30만의 대군이 참전했습니다. 병력 공백이 발생했다고 판단한 북한은 무장공비를 남파하는 등 각종 도발을 벌였습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려 했고, 한미 관계는 냉랭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하고, 국산 무기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자주국방 정책에 사활을 건 것입니다.
삼성은 이런 가운데 미사일, 포, 항공 무기 등을 개발하는 방산업에 ‘사업보국’의 각오로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1984년 삼성정밀공업이 155mm 자주포를 생산해내자 누구보다 기뻐하며 직원들을 격려하는 등 방산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고 합니다.
삼성정밀공업은 1987년 삼성항공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0년 삼성테크윈으로 거듭났습니다. 삼성테크윈은 프랑스 탈레스그룹과 5대 5 지분 합작으로 삼성탈레스라는 자회사도 새로 세웠습니다.
하지만 삼성은 2015년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를 한화에 매각해 넘겼습니다.
요즘 불경기에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주가는 펄펄 날지요. 이 한화에어로가 삼성테크윈의 후신(後身)입니다. 2015년 삼성테크윈이 한화에 인수되면서 한화테크윈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것이 2018년 한화에어로가 됐습니다. 삼성탈레스는 오늘날 한화 시스템의 전신(前身)이고요.
방위사업청에 따르면, K방산 수출액은 2022~2024년 3년 합계가 403억 달러(약 58조원)에 달했습니다. 방산은 요 몇년 내내 ‘수출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한화에어로뿐 아니라 현대로템·HD현대중공업 그리고 LIG넥스원 등 방산업체들은 ‘K방산의 신화’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사업보국’ 삼성은 왜 방산을 포기했을까요?
◇이건희 “삼성의 자랑 훼손됐다” 대노
요즘엔 방산이라고 하면 국가 주력 산업으로 여겨지지만, 과거엔 비리의 대명사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습니다. 삼성은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 여러 회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삼성테크윈 등 방산이 비리의 온상으로 취급 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부담을 가졌다고 합니다. 자칫 오너 리스크로 연결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3년 율곡 비리 사건, 1996년 린다 김 로비 사건 등 각종 비리 사건이 한번 터졌다가 좀 조용하다 싶으면 또 터지기를 반복했습니다.
방산 관계자들의 부도덕함도 문제였지만, 정치권의 개입과 이에 따른 검찰의 무리한 수사도 방산에 대한 이미지를 얼룩지게했습니다. 무기 개발과 방산업체 선정 과정 등은 일반 형사 사건에 비해 전문적이고 참고할 판례도 적습니다.
베테랑 검사라 하더라도 방산 수사 경험은 미천했습니다. 그런데 권력자의 방산 비리 척결 지시에 따라 달려든 검사들은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사는 신중하지 못했고 구속 영장이 남발됐습니다. 춤추는 칼에 무고한 이들이 어이없이 다쳤습니다. 일상을 유린 당했습니다. 언론의 섣부른 보도 또한 군과 방산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2014년 합동수사단의 이른바 ‘8대 방산 비리’ 수사가 대표적입니다. 전직 해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비롯해 전현직 고위 장교 수십명이 구속 기소됐지만, 막상 재판을 해봤더니 50%가 무죄였습니다. 통상 형사 재판 무죄율은 2~4%에 불과한데, 이보다 최대 25배 높은 무죄율이 나온 것입니다. 충격적입니다.
방산업은 원가 계산에 정부(방위사업청)가 깊숙이 개입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사기관이 이에 대한 이해와 고려 없이 ‘원가 부풀리기’ 등으로 기소를 남발했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잡아넣기 위한 수사를 했다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무죄가 나오기까지 3년여의 시간 동안 방산업체과 방산 관계자들은 ‘비리’ 딱지를 달고 손가락질을 당했고 재산을 날렸습니다. 제가 사장이었어도 방산 비즈니스는 하기 싫었을 것 같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사업보국’ 철학을 물려받은 아들 이건희 회장은 삼성테크윈이 K-9자주포와 관련해 비리 논란에 휘말렸을 때 ‘대노’했다고 합니다. 삼성테크윈 사장은 감사 과정에서 내부 비리가 적발된 데 책임을 지고 사장단회의 직전 사표를 냈습니다.
당시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사장단회의에서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된 데 대해 이건희 회장이 전날 강하게 질책했다”고 전했습니다.
◇리스크는 크고 마진은 작고
문제는 리스크가 크면 돌아오는 거라도 커야하는데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방산의 이윤율(마진율)은 약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다른 제조업은 5%가 넘고, 부가가치가 높은 반도체의 경우는 30~50%에 달합니다.
방위사업청은 방산업체와 계약에서 적당한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방산원가대상물자의 원가계산에 관한 규칙’이라는 국방부령에 따라 원가계산 기준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이윤율은 사업의 성격, 위험도, 기술 수준, 투자 규모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연구개발(R&D) 사업의 경우 기술적 불확실성과 높은 위험을 감안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이윤율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단순 조달 계약의 경우 낮은 이윤율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성능과 신뢰성은 뒷전이고 무조건 값싼 무기로 결정하는 최저가 입찰제, 지나치게 높은 군의 성능요구 조건, 짧은 연구개발 기간 같은 구조적·제도적 폐해도 낮은 이윤율의 원인으로 꼽힙니다.
한국국가전략연구원(KRINS)의 오동룡 군사방산센터장은 “반도체 등 주력 사업으로 회사를 키우고 있는 삼성 입장에서는 방산 부문이 상대적으로 매출은 작은데 비리에 연루되는 등 리스크는 커 부담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브랜드 가치를 관리하고, 사업에 전략적으로 집중하기 위해 테크윈을 분가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정치인이 손 떼야 방산이 산다”
정치권의 개입도 삼성가의 방산 포기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힙니다. 사실 지금도 모든 방산업계가 곤욕스러워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발 우리 좀 내버려둬”라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도 정치권이 방산업계를 흔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국가 안보 차원에서 하루 빨리 진행돼야할 ‘한국형 차기구축함(KDDX)’ 도입 사업이 또다시 지연된 것입니다.
KDDX는 선체와 이지스 체계를 모두 국내 기술로 건조하는 첫 국산 구축함 사업입니다. ‘미니 이지스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요, 총 6척을 건조할 계획으로 사업비는 7조8000억원을 넘습니다.
당초 KDDX 사업은 2023년 12월 기본설계 완료 이후 지난해 ‘KDDX 상세설계 및 선도함 건조’ 사업에 착수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등 두 업체의 법적 분쟁과 과열 경쟁으로 사업이 1년 이상 지연됐습니다.
HD현대중공업는 KDDX 기본설계를 담당한 자사가 관행대로 수의계약을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한화오션은 HD현대중공업이 군사기밀 관련 사고를 일으켰다면서 수의계약이 아닌 경쟁입찰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방사청은 이에 ①수의계약 ②경쟁입찰 ③양사 공동개발 등 3가지 사업 방식을 놓고 검토해왔는데요. 관례에 따라 HD현대중공업과의 수의계약에 무게를 둬 왔습니다. 이에 지난달 24일 분과위에서 이를 결정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국회 국방위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부승찬 의원이 지난달 24일 열린 국방위 회의에서 “국방부가 4월 내로 특정 업체와의 수의계약을 통해 이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얘기가 들린다”며 “방산 알 박기”라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상황은 방산 비리, 방산 게이트로 의심된다”는 말도 튀어나왔습니다.
이미 두 업체간 경쟁으로 1년 넘게 지연이 됐고, 이에 따라 절차와 관례를 고려해 진행하는 것을 ‘알 박기’ ‘방산 비리, 게이트’라는 정치적 수사로 막아 세운 것입니다. 왜 비리인지에 대한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KDDX 사업은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붕 떠버렸습니다. 방사청은 조만간 국회를 대상으로 KDDX 사업에 관해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고, 국방부와도 사업추진 방식에 대한 검토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치 일정 등을 고려할 때 사업 방식 결정은 대선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옵니다.
우리의 첫 국산 구축함 사업이 표류하는 가운데, 북한은 공교롭게 지난달 25일 신형 다목적 공격 구축함 진수식을 공개하고, 사나흘 뒤인 28~29일 이 구축함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를 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은 여기에 전술핵 탑재 탄도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7조8000억원대 국산 구축함 사업에 정치인들이 어슬렁 거리는만큼 해군 함정 전력의 공백기도 길어지고 있습니다.
채우석 한국방산학회 이사장은 전화 통화에서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15년 ‘사업보국’을 내걸었던 삼성이 오죽했으면 방산을 포기했을까에 대해 우리 정치권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면서 “다른 무엇보다 방산에 대해서만큼은 사심은 내려놓고 국익을 우선해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군과 외교안보, 그리고 첨단 기술패권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요? 조선일보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은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최신 외서들 중에서도 인사이트 가득한(insightful) 양서를 골라 해제해드리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읽은 영어 원서는 ‘더 테크놀로지컬 리퍼블릭(The Technological Republic)’입니다. 첨단 기술과 무기,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에 관심이 있으셨다면, 또는 미국 주식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이라면 다 아실 미국 혁신 기업 ‘팔란티어’의 CEO인 알렉스 카프(Alexander C. Karp)의 신간입니다.
우리말로 ‘기술 공화국’이라 번역할 수 있겠는데요, 이 책은 지난 2월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제가 막 그무렵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을 했는데, 조지타운 외교스쿨 산하 첨단기술 안보연구소(CSET)에서 이 책이 상당히 인기여서 저 또한 탐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렉스 카프는 팔란티어 공동창업자로 2025년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된 인물입니다. 이 책은 미국 등 이른바 ‘서구’의 나태한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서이자, 실리콘 밸리의 소극적인 리더십, 야성 잃은 기술자 및 기업인에 대한 고발장 같은 책입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오늘날 미국이 중국이란 나라에 추격 당하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실리콘 밸리는 방향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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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란티어
방대한 데이터를 AI로 분석해 솔루션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지형·날씨·무기 등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 주목받았다. 직원 수는 3700여 명에 불과하지만, 11만명의 록히드 마틴을 뛰어넘어 시가총액 1위(약 300조원)의 방산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방위산업체뿐 아니라 미국 연방 정부, 대형제약회사, 보험회사 등도 고객으로 두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펜타곤 등으로부터 투자를 받았고, 최근에도 민,관 구분없이 투자를 받고 있어 트럼프 관세 전쟁 중에도 호황을 누리는 극소수의 업체다. 기술, 그리고 인재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