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급 원자력 추진 잠수함 ‘일리노이’함이 2015년 미국 코네티컷주 그로턴 조선소에서 건조되고 있는 모습. 트럼프 대통령은 30일 “한국 원자력 추진 잠수함은 미국 필라델피아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며 “미국의 조선업은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30일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면서도 “한국은 이를 미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리조선소를 현대화해 원잠을 만들라는 것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위대한 한국 조선업체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건설하도록 승인했다”며 “미국의 조선업 재건은 미국의 국가 안보에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당초 원잠 연료인 ‘농축 우라늄’만 확보해 국내에서 원잠을 독자 설계·건조하려던 우리 정부 의도와는 다른 얘기다.

◊필리조선소 ‘재건’은 돌출 변수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9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결단해 달라”고 한 것은 원잠 연료인 농축 우라늄 공급 문제였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에서 “원잠을 건조할 수 있는 여러 여건을 이미 갖춰 놨고 마지막에 연료가 필요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하지만 미국 내에서 원잠을 건조하라는 ‘역제안’을 받으면서 변수가 생겼다.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은 “필리 조선소에 가봤는데 (대형 상선·군함 시설은 있지만) 잠수함 건조 시설이 없었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 요구대로 하려면 한화오션이 그곳에 잠수함 건조 시설을 신설 투자해야 한다.

예비역 해군 대령 출신인 문근식 한양대 교수는 “인프라 구축에만 3~5년은 걸릴 것”이라고 했다. 한 전문가는 “미국 내 인건비와 물류비를 고려하면 한국에서 원잠을 만드는 것보다 3~4배 많은 비용이 더 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안 장관은 ‘필리조선소 건조’ 문제에 대해 “한미 간 추가적인 논의를 반드시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회 승인, 원자로 인허가 등 복잡

트럼프 대통령의 ‘필라델피아 건조’ 발표가 정확히 어떤 취지인지도 아직 불명확하다. 만약 한국이 원잠 기술을 독자 개발하되 미국에서 건조하라는 뜻이라면 이는 전례가 없는 일로, 원자로 개발과 건설을 위한 인허가 등이 까다로울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AP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 내용을 미국의 원잠 기술을 한국과 공유하려는 취지라고 해석하면서 “최우방인 영국 등에도 주지 않던 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라고 했다.

만약 미국 원잠을 한국에 수출하거나, 원잠 건조 기술을 한화오션에 이전하겠다는 뜻이라면 트럼프 대통령 혼자 ‘승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미국은 국제무기거래규정(ITAR) 등을 통해 원잠과 관련 물자, 기술의 수출을 매우 촘촘히 통제하고 있다. 이를 국무부·국방부·상무부·에너지부 등의 수출 통제 심사를 받고, 수출 통제를 면제받기 위한 미 의회의 별도 입법 절차와 건별 승인 등도 거쳐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원잠을 도입하면 계속 미국의 강한 통제를 받게 된다. 그만큼 미국의 ‘핵심 동맹’이 되어 미 해군을 위한 원잠 건조 사업 등을 수주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 대통령이 구상하는 ‘자주국방’과는 거리가 멀다.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 별도 추진해야

현행 한미 원자력 협정은 기본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원잠 연료 해결을 위한 별도 협정이 체결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이와 별도로 기존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도 계속 추진해야 한다. 2015년 개정된 현행 협정은 한국이 20% 미만 저농축우라늄도 생산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금지했다. 한국 원전 기술이 우수해도 원전 연료 생산부터 사용후핵연료 재처리까지 완전한 ‘원전 사이클’을 완성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원잠 도입을 위해서도 협정을 손봐야 하지만 원잠은 우라늄 농축 권한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는 완전히 별개”라며 “(이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은) 협정 문구 조정만 남은 문제니까 큰 방향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중국의 반발과 일본의 원잠 확보 동향 등도 주의해야 한다. 지난 9월 일본 방위성 자문위원회는 ‘차세대 추진 시스템’으로 잠수함 함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사실상 원잠 도입을 뜻한다. 최근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주요 정책 공약 중 하나로 이를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