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7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일 한국의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펀드 조성 계획을 언급하며 “이건 선불(upfront)”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내 친이재명계 인사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는 27일 미국의 요구가 과도하다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 “동맹국인 한국을 마치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고 논평했다./신화 연합뉴스

한미가 대미 투자 펀드 3500억달러의 출자 및 집행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관세 협상에서 난항을 겪는 가운데, 여권(與圈)에서 대미 강경 메시지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관세 협상 교착으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상승하는 등 경제적 여파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과도한 요구를 부각해 ‘정부 책임론’을 피하고, 대미 협상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메시지가 오히려 한미 관계에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親明 모임 “美 정부 강력 규탄”

더불어민주당 강성 친명(친이재명)계 원내외 인사의 모임인 ‘더민주혁신회의’는 27일 ’3500억달러 현금 선불 요구, 트럼프 정부는 한국을 파산시키려는가’라는 논평을 통해 “무도한 관세 협상으로 국민 주권을 훼손하는 미국 정부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5일(현지 시각) “한국의 대미 투자금 3500억달러는 ‘선불(upfront)’”이라고 말한 것을 비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한국에 대미 투자를 3500억달러 이상으로 늘리고 상당 부분을 현금으로 낼 것을 요구했다는 외신 보도를 인용하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고 했다. 이들은 또 “미국이 안보 동맹국이자 경제 동맹국인 한국을 마치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며 “단일 대오로 한국 국민의 경제 주권을 지켜내는 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이른바 ‘이 대통령 친위 조직’으로 알려진 더민주혁신회의는 당내 문제뿐 아니라 주요 국정 현안과 관련해서도 이 대통령과 수시로 소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평의 주요 내용도 이 대통령의 협상 방침과 일치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2일 공개된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한미 간)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 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더민주혁신회의도 논평에서 미국 주장대로라면 한국은 “제2의 외환 위기를 맞게 된다”며 “우리 정부는 트럼프 정부의 부당한 요구를 절대 수용해서는 안 된다. 또한 미국·일본과 무제한 통화 스와프 등의 통화 안전장치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여권 주류 ‘자주파’의 속내 반영

전직 한 고위 당국자는 “더민주혁신회의의 논평은 여권 내 ‘자주파’의 기류를 반영한 것 같다”며 “외교관 출신의 위성락 국가안보실장과 조현 외교부 장관 등 ‘동맹파’들이 한미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지 않도록 관리하려는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했다.

위 실장은 27일 언론 인터뷰에서 “(3500억달러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범위”라며 “여야를 떠나서 누구라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갖고 얘기하려 하고, 대안을 협의하고 있다”고 했다. 조 장관은 이날 보도된 AP 인터뷰에서 최근 발생한 조지아주(州) 한국인 근로자 구금 사태에 대해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점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미국을 비난하기보다 절제된 입장을 낸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여권 내에서는 한미 동맹보다 남북 관계를 중시하는 ‘자주파’ 인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 민주당 자문위원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26일 당 지도부가 참석한 세미나에서 “‘이거 미국이 싫어할 텐데요, 미국이 싫어한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있다. 소위 동맹파가 너무 많다”고 했다.

이는 이 대통령의 현안 대응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대통령은 방미를 앞둔 지난 21일 페이스북에 “외국 군대가 없으면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각의 굴종적 사고가 문제”라고 썼다. ‘자주국방’을 강조하는 취지였지만 ‘주한미군’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는 표현이었다.

외교가에서는 “정치인들이 국내용으로 반미(反美) 여론을 고조시켰다가 대미 협상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외교 소식통은 “국내 여론을 협상 지렛대로 삼는 것도 방법이지만 상대는 완강한 성격의 트럼프 대통령”이라면서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달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도록 냉정하게 대미 협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미 강경 메시지가 트럼프 행정부를 자극해서 현행보다 더 고율의 관세 부과나 다른 조치로 돌아올 가능성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