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군수 조병갑은 1892년 고부에 부임했는데, 어떤 연유에선지 바로 다음 해에 익산군수로 전임(轉任)된다. 막 터를 잡고 치부를 시작하려던 차에 새 임지로 발령이 나자, 이를 되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수단은 로비였다. 전라감사 김문현을 찾아간다. 이미 조병갑에게 받아먹은 것이 많던 김문현은 조정에 유임 요청을 보내 조병갑을 다시 고부군수에 앉힌다. 고부에 복귀하기까지 한 달여가 걸렸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사이 무려 여섯 명의 후임자가 고부에 부임했다가 물러났다(신복룡, ‘동학사상과 갑오농민혁명’). 당시 매관매직이 이 정도로 심했다. 만경평야 한가운데 노른자위 땅에 군수 자리가 나자 비집고 들어오려 한 이가 많았던 것이다. 그 벼슬 장사를 조정이 했다. 망한 나라 ‘구한(舊韓)’의 말기가 이랬다.
조병갑을 떠올린 건 ‘구청장’을 노렸던 김경 전 서울시의원 때문이다. 그가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포함해 일부 여당 실세 의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는 일들이 통화 녹음 형태로 있다고 한다. 2023년 7월 강서구청장 출마가 무산돼 “돈을 너무 많이 썼다, 아깝다”라고 했을 때 심정은 고부에서 하루아침에 익산으로 발령 난 조병갑 심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매관매직은 비용편익 관점에서 봐야 한다. 돈을 써 관직을 얻을 수 있고 이를 회수할 수 있다면, 돈을 얼마나 쓸지 ‘가격’이 나온다. 비용 회수는 대부분 공공사업 형태를 띤다. 예컨대 조병갑은 고을민을 동원해 만석보를 쌓아 놓고 물을 댈 때마다 수세(水稅)를 받아 이를 착복했다. 김 전 시의원은 의정 활동 중 청년용 ‘매입 임대주택’을 늘리라고 반복적으로 요구했다는데, 이때 남동생이 지은 오피스텔을 SH공사 청년 임대주택용으로 매각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직접 수탈이 아닐 뿐, 이것도 국민 세금을 착복한 것이다.
김문현 전라감사가 조병갑의 군수 자리를 챙겨준 것처럼, 지금은 국회의원이 공천을 보장해주고 지방의원은 이권을 챙긴다. 김병기 의원 부인에게 자신의 업무추진비 법인카드를 쓰게 해줬던 조모 동작구의회 부의장은 이 지역 재개발조합장이었다. 공천을 줬기에 ‘상납’을 기대하고, 공천을 받은 덕에 각종 인허가·조례·예산·민원에 개입해 돈을 만들 수 있었다.
국민이 선거로 공직자를 선출하는데 무슨 구한말 타령이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곳들은 사실 선거와 별 관계가 없다. 특정 정당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보장되기에 이런 ‘수익 모델’이 가능하다. 김경 전 시의원 입에서 나왔다는, “나만 그런 게 아닌데 억울하다”는 말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전국 226곳의 시·군·구 어디에선가 당선만 보장된다면 법인카드 갖다 바치고, 굳이 ‘헌금’이라 부르는 공천뇌물을 상납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것이다.
‘헬조선’(지옥+조선)이라는 말이 등장한 지 10여 년이 지났다. 이는 함께 유행했던 ‘수저 계급론’ ‘노오력의 배신’ 같은 말과 함께 다소 과장 섞인 비유로 받아들여졌다. 아무리 불공정해도 백성을 제도적으로 수탈했던 진짜 헬조선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우리나라의 순자산 지니 계수가 0.625를 기록했다. 사회적 불평등을 나타내는 이 지수가 0.5를 넘으면 공동체가 감내하기 어려운 불평등 사회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코스피 5000 시대의 장밋빛 전망이 아무리 쏟아져도, 부동산 가격 폭등과 자산 양극화를 체감하는 이들에겐 오히려 박탈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김경 전 서울시의원과 강선우·김병기 의원 등은 민주주의와 선거 제도를 농락한 또 다른 수탈의 구조를 보여줬다. 이제 누군가 여기가 헬조선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하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