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에서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등 범죄에 가담했다가 현지 경찰 조사를 받고 이민 당국에 구금됐던 한국인 64명이 지난 18일 오전 인천공항 2터미널을 통해 송환 되고 있다. /장경식 기자

KBS 주말 유명 개그 프로에서 ‘황해2025’란 코너를 보는 마음이 영 편치 않다. 매번 보이스 피싱을 개그 소재로 삼는데, 엊그제는 여성 개그맨이 화상 채팅으로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왔다. 로맨스 스캠을 웃음의 소재로 삼기엔, 최근 캄보디아에서 보이스 피싱 조직에 희생당한 우리 대학생 사망 사건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이 코너 원조 격으로 2013년 5월부터 1년여간 방송된 ‘황해’가 있었다. 연변 말 흉내를 잘 내는 신인 개그맨 이수지를 일약 스타로 만든 코너다. 비슷한 시기 유튜브에는 이른바 ‘역관광’(상대방을 속이려다가 자기가 속는 상황)이니 ‘보이스 피싱 참교육’이니 하는 제목의 영상이 나돌았다. 모두 어설픈 피싱범이 사람을 속이려다 신분이 들통나고 조롱당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심리적 장벽을 낮춰 경계심을 허물지 않았을까.

/KBS Entertain 유튜브 화면 캡처 KBS 개그콘서트에서 2013년 5월부터 1년 여간 방송된 '황해' 코너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보이스 피싱은 연간 피해액 규모 1조원대를 넘보는 범죄 산업으로 진화했다. 어수룩해 보였던 피싱범들은 동남아 일대로 근거지를 옮겨 우리 국민들을 감금해 놓고 기관 사칭에 복권 당첨, 암호화폐 투자 권유 등을 일삼는 무시무시한 범죄자였다.

보이스 피싱은 피해 장소(국내)와 범죄 행위가 일어나는 곳(해외)이 달라 적발과 증거 수집 등에서 어려움이 크다. 이는 해외에서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이른바 ‘정보 조작’ 범죄와도 유사하다. 두 유형의 범죄 모두 정보를 조작해 사람을 속이는 게 핵심인데, 개인을 상대로 하면 보이스 피싱이고, 사회를 대상으로 하면 해외 정보 조작·개입(FIMI·foreign information manipulation and interference)이다.

여러 나라 국경이 접해 있는 유럽에선 오래전부터 해외 정보 조작·개입이 큰 골칫거리였다. 유럽대외관계청(EEAS) 보고에 따르면, 2024년에 약 505건의 ‘해외 정보 조작·개입’ 사건과 6만8000건 이상의 관찰 필요 콘텐츠가 적발됐다. ‘악당 국가’는 주로 러시아와 중국. 우리 국가정보원이 2023년 국내 매체로 위장된 200여 개 사이트를 찾아냈을 때 그곳을 운영한 곳도 중국 홍보 업체였다. 국정원은 지난 4월에도 ‘○○일보’ ‘▲▲뉴스’ 등 언론사 제호를 쓰는 가짜 사이트를 찾아냈다. 상당수는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 최근 뉴스인 ‘최선희 러시아 방문’이나 국내 한 지자체의 중국 투자 관련 기사 등 맥락 없는 뉴스를 올려 놓은 사이트는 한눈에 봐도 조악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이트가 국내 매체명으로 운영되는 것 자체가 언론 전체 신뢰도를 낮추는 일”이라고 했다. EU 보고서도 “이들의 목표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보 유통 체계의 신뢰를 허무는 것”이라고 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사회에 이런 사이트들이 퍼져 있었다.

해외 세력을 탓할 것도 없다. AI(인공지능)로 만든 통화 녹음을 증거라고 국회에서 틀고, 청담동 술자리 게이트 같은 억측에, 때 되면 나오는 부정선거 음모론까지 우리 스스로 이미 정보 유통의 토양을 더럽히고 있다.

몇 년 전 스웨덴에서 만난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언론인은 “국민들이 러시아가 퍼뜨린 조작 영상에 너무 익숙해져 여론 시장이 왜곡되고 있다”고 했다. 북유럽 국가들과 러시아 사이에 낀 인구 186만명 소국(小國)인 이 나라는 최근 러시아어권 주민들에 대해 미디어 교육을 강화하고, 러시아 선전·허위 정보 유포 매체에 대한 접근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될 위험은 없을까. 허위 정보에 쉽게 흔들리고,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관대한 현재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해외 세력의 영향력이 커질 수 있다. 유튜브와 틱톡, 쇼츠가 쏟아내는 재미에 빠져 허위 조작 정보에 놀아나고, 내 편만 맞다는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으려면 ‘의심하는’ 버릇부터 들여야 한다. 잘못하면 보이스 피싱 공화국이 조작 정보 공화국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