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KBS (한국방송공사) 사옥./조선일보DB

지난 8월 26일부터 새 방송법이 시행됐다. 사장추천위원회 설치, 편성위원회 의무화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가장 본질적인 변화는 KBS 직원들이 이사를 뽑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KBS 이사회는 국회 교섭단체가 추천하는 이사 6명을 포함해 KBS 임직원과 시청자위원회, 방송·미디어 관련 학회, 변호사 단체가 추천한 15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KBS 직원들 몫이 3명으로, 국회 추천 다음으로 많다. 전체 이사의 20%에 해당한다.

KBS의 예산·자금 계획과 결산, 경영 평가, 사장 임명 제청 등에 대한 심의·의결권을 가진 이사회에 직원 추천 이사가 이렇게 많은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이해 충돌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계속 있었지만, 여당은 숫자로 밀어붙였다. 숫자에서 밀리면 어쩔 수가 없다.

방송법에서 직원 추천 이사를 규정한 조항이 얼마나 디테일하게 만들어졌는지는 꼭 한번 봐야 한다. 해당 조항은 이렇다. ‘공사(KBS)의 임직원 과반수가 방송 전문성과 방송 보도, 제작, 기술 등의 직종 대표성을 고려하여 추천하는 사람 3명’(46조3항 중)이라고 해놓았다. 여기서 ‘보도’ ‘제작’ ‘기술’은 KBS 내 직능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기자협회·PD협회·방송기술인협회 3단체가 대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 자리 3명 줄 테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공영방송 이사와 같은 사회의 주요 자원을 배분하는 권한은 국민의 선택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다. 구(舊) 방송법에선 방송통신위원회가 KBS 이사를 추천했다. 방통위원은 대통령(2명)과 국회(3명)가 임명했다. 비록 ‘정치적 후견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을지언정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라는 국민 선택의 결과를 간접적으로나마 반영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방송사 임직원과 같은 내부자 집단이 어떻게 국민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방송사 직원을 국민들이 선출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KBS의 지배 구조는 원래 영국 BBC나 일본 NHK 이사회 모델을 따랐다. 다만 이들 국가와 달리 한국은 정치 권력이 바뀔 때마다 전(前) 정부 시절 임명된 이사를 몰아내고 공영방송 경영진을 바꾸느라 한바탕씩 진영 전쟁을 치렀다. 문재인 정부 때 해임됐다가 해임 취소 소송을 벌여 승소한 강규형 이사가 있다면, 윤석열 정부에선 해임됐다가 법원에서 해임 처분 취소를 받아낸 남영진 이사가 있다.

방송법 개정에는 이런 악순환을 끊자는 문제의식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독일식 제도를 제안한 전문가도 많았다. 독일 공영방송인 ZDF의 경우 60명으로 구성된 이사회에 지역을 대표하는 16개 주별 이사가 포함되고 종교계, 여성계, 노동계, 경영계, 소수자, 예술인 등 사회 각 계층과 집단을 대표하는 이사들이 들어갔다. 그런데 한국은 막상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 방송국 직원과 변호사 단체, 방송 미디어 관련 학회가 나눠 먹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국민들은 오히려 소외된 셈이다.

게다가 KBS 이사는 한번 추천하면 끝이다. 이사 임명 규정에 ‘(대통령은) 추천한 날부터 14일 이내에 (이사를) 임명하여야 하고, 그 기간이 경과하면 즉시 임명된 것으로 본다’고 해놓았다. 선거에서 대통령이 바뀌어도 자신들이 추천한 이사를 거부하지 못하게 넣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겐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대한 거부권은 있지만, 정치권과 KBS 직원들, 변호사 단체와 학자들이 추천한 KBS 이사에 대해선 거부할 권한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여권에서 “국민께 방송을 돌려 드리겠다”고 만든 방송법의 실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