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미국 할리우드가 멈췄다. 1만여 명이 소속된 미국작가조합(WGA)이 그해 5~9월 파업했다. 배우·방송인 노조도 7월부터 파업에 동참해 영화와 TV 시리즈 제작이 중단됐다.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등 유명 스타들이 지지 의사를 밝힌 이 장기 파업은 ‘인공지능(AI) 도입에 맞선 인류의 첫 파업’이었다. “AI 활용을 제한하라”가 요구 조건의 하나였다.
작가들은 생성형 AI가 인간의 대본으로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거나 작법을 학습한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우들은 딥페이크 기술이 자신들의 외모나 목소리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우려하며 디지털 초상권 개념을 들고 나왔다. 생성형 AI 사용에 대한 일종의 규칙이 만들어졌다. 의미 있는 성과였지만 영화계에 AI가 도입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일터와 학교, 가정에 AI가 들이닥친다. 거부할 수 없고, 올라타 적응해야 하는 물결이다. 그런데 어떤 직업에는 미래가 더 빨리 도착한다. 구글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 챔피언 이세돌을 “창의적인 수법”으로 꺾은 지 9년. 작가 장강명이 전현직 프로기사 30명을 취재해 쓴 ‘먼저 온 미래’에는 압도적 기술 혹은 쓰나미를 먼저 경험한 풍경이 소슬하게 담겨 있다.
“돌려봤어?”는 그 격변을 상징한다. 대국이 끝나면 프로기사들은 묻는다. AI로 분석해 봤냐는 뜻이다. 승자와 패자가 대국을 길게 복기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어디서 실수했고 어떤 길이 있었는지 AI를 돌려보면 즉시 정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옳다고 믿던 정석들은 폐기됐다. 이세돌은 “바둑을 예술로 배웠는데 그 세계가 무너졌다”며 은퇴했다.
AI는 5000년 된 바둑을 파괴한 게임 체인저였다. 알파고 등장 이전은 기원전, 이후는 기원후로 불린다. 프로기사들은 고성능 컴퓨터와 엔비디아의 그래픽 카드를 사들였다. 집에서 AI로 배울 수 있으니 도장이나 스승을 찾을 이유는 줄었다. 권력의 이동이다. AI 수법을 거부한 기사는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실력은 상향 평준화됐지만, 개성이 없어져 바둑의 매력은 감소했다.
대화형 인공지능 챗GPT는 빠른 속도로 일상에 침투했다. AI가 작곡한 음악이 쏟아져 나왔고, 2024년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일본 작가는 “수상작의 약 5%는 챗GPT가 만든 문장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교사들은 학생생활기록부를 챗GPT로 작성한다. 뭔가를 훼손한다는 자의식 없이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사진을 지브리 애니메이션처럼 바꿨다.
그 애니메이션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그것이 쉽게 생산되지 않는다는 사실, 많은 애니메이터가 그 한 장을 위해 공을 들였다는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생에 걸쳐 이룩한 성취와 관련돼 있다. 애니메이션 회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왜 빅테크 기업이 좌지우지하는가? AI는 다정한 침략자다. 온갖 영역에서 어떤 일의 의미와 인간의 유능함을 납작하게 짓누를 것이다.
딥러닝으로 사례를 학습한 AI 진단 도우미가 우울증 진단과 처방에 통찰을 갖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실력이 비슷하다는 것만 입증돼도 의사들은 큰 타격을 입는다. 이사회 멤버들은 AI 경영 도우미의 제안을 따르지 않는 최고 경영자를 믿고 지지할까?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판사가 AI 판결 도우미의 제안과 다른 판결을 한다면 어떤 논란이 벌어질까?
바둑계는 그 혼란을 먼저 겪었다. 작가는 “꽃이 피었다”와 “꽃은 피었다” 사이에서 며칠 고민할 필요 없이 AI를 돌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터미네이터가 인간에게 반기를 들면 어쩌나,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으면 어쩌나 두려워한다. 하지만 장강명 말마따나 설사 터미네이터를 막고 일자리를 지키더라도 그 과정에서 어떤 인간적 가치들은 부서질 것이다. AI와의 동행 못지않게 방향과 기준, 윤리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돌려봤어?” 묻는 세상이 들이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