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 카리나, 현재 이 사진은 내려진 상태다./인스타그램

대선일을 며칠 남겨놓고 숫자 ‘2’가 적힌 붉은색 재킷 차림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던 걸그룹 에스파 카리나가 결국 사과했다. 지난 6일 한 유튜브에 나와 “제가 좀 너무 무지했다. 어떤 의도도 없었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대선 하루 전날, 역시 붉은 옷차림 때문에 문제 됐던 홍진경은 대선 당일 부랴부랴 사과문을 올렸고, “오빠야 니 쫄았제”(영화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로 유명한 배우 김혜은은 유시민을 비판했다가 선거 다음 날 새벽 사과의 글을 올렸다. 둘 다 손글씨로 직접 쓴 반성문을 찍어서 올려 몹시 ‘쫄아 있음’을 보여줬다.

대선 이후 한참 동안 반응이 나오지 않던 카리나가 한 달여 만에 사과를 해버리니, 좀 맥이 빠졌다. 팬클럽에 해명하고 소속사가 입장문만 냈던 초기와 달리 자기 목소리로 직접 사과했다. 굳이 안 그래도 될 텐데 왜 그랬나 의문을 갖는 이도 많다. 한 대형 연예 기획사 고위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카리나 정도면 소속사 차원에서 결정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대선 이후 달라진 세상의 공기를 보라는 것이었다. 연예계는 어느 집단보다 이런 변화에 민감하다고도 했다.

반면, 남성 연예인이고 진보를 표방할 경우엔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다. 가수 이승환은 오히려 파란 셔츠 차림으로 대놓고 사전 투표소 앞에서 ‘인증 사진’을 찍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뭐라 하는 사람 본 기억이 없다. 정치색을 비판하는 댓글에 ‘그러면 스머프는 민주당이냐’란 글이 달리는 걸 보면, 기본적 분별력 정도는 있는 이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왜 유독 ‘여성 연예인의 붉은 옷’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까.

여성 연예인에게 ‘정치’, 그것도 ‘보수’의 색깔이 묻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번 사과는 비밀 연애를 들켜 발표하는 연예계의 흔한 사과와는 전혀 다르다. 자신들을 정치적 금치산자로 몰아가는 무형의 폭력 앞에서 여성 연예인들은 “제가 무지했다”(카리나), “무조건 제 잘못”(홍진경), “말이 가진 무게 배웠다”(김혜은)며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굴복’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이들은 효능감을 느꼈을 것이다. 힘이 제대로 작동했을 때 얻는 쾌감(快感) 말이다.

효능감은 얼마 전 청문회에서도 극에 달한다. 갑질, 투기, 위장 전입, 불투명한 돈거래 등으로 도마에 오른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청문회장에서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어쩌라고요’ 식으로 버텨도 야당은 힘 한번 써보지 못했다. ‘도덕성 검증 필요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인사혁신처장에 임용되고, ‘청담동 술자리 가짜 뉴스’ 관련자도 공직을 맡았다. 대선 얼마 뒤 돌았던, “이제 세상 바뀐 것 보여 드리겠다” “공직 사회가 세상 바뀐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등 여권 내에서 나온 말들은 단순한 으름장이 아니라, 권력의 새로운 작동 방식을 예고하는 선언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는 계명(誡命)이 나온다. 원래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였는데, 슬그머니 바뀌어 헷갈리게 한다. 혁명이 성공한 후 점점 인간처럼 행동하는 돼지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던 동물들은 그래도 계명이 맞겠지 철석같이 믿고 따른다. 오웰은 그렇게 더 이상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은 없어졌고, 새 지배 계급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권력의 이중성과 위선을 고발한 것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요즘 우리 사회에서 현실이 된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든다. 야당 때 인사 청문회 기준은 여당이 되자 가볍게 무시해버리고, 여자 연예인이 빨간 옷 입으면 자필 사과문, 남자 연예인이 파란 재킷 입으면 인증샷 찍어 올리는 것을 보며 든 생각이다. 어떤 이들에겐 참 편한 세상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