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청와대 시절 말수가 적고 온화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내부에선 ‘착한 문재인’이라 불렸다. 노무현의 후계자가 된 데는 ‘가장 착해 보이는 친노(親盧)’라는 평가가 컸다. 인권 변호사 이력까지 더해 ‘정의로운 문재인’이란 이미지도 생겼다. 이는 폐족(廢族)의 수장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원동력이 됐다.

지지자들은 ‘착하고 정의로운 문재인’을 앞세워 맹종(盲從)에 가까운 충성심을 보였다. 이는 성역이자 신앙이 됐다. 팬들의 열광에 문 대통령도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게 된 듯하다. 문빠들은 문 대통령과 정책에 대한 비판을 ‘교주(敎主)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떼 지어 상대방을 공격했다. 여야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문자 폭탄과 이지메가 이어졌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를 “경쟁을 흥미롭게 하는 양념”으로 치부했다. 내가 정의로우니 문빠의 양념도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비쳤다.

인증샷 찰칵찰칵 - 문재인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시절인 2017년 4월 18일 전북 전주의 전북대학교 앞 유세 현장에서 자신과 악수를 하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다.

이후 여권에선 누구도 이들을 비판하거나 제어할 수 없게 됐다. 대통령의 보호 아래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된 10만~20만명의 양념 부대는 정부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경선 등 당내 헤게모니도 장악했다. 여당 지도부와 각료들도 이들에 맞서 소신을 말하기 힘들어졌다.

‘양념 바이러스’는 조국·추미애 사태를 거치며 여권 전체로 번졌다. 멀쩡하고 합리적이던 사람들까지 ‘양념의 신도’로 돌변한 것이다. 작년 조국 수호의 총대를 멨던 김종민 의원은 그 몇 달 전만 해도 정부 정책에 비판적 소신을 밝혔던 사람이다. 언행이 신중했던 윤호중 법사위원장은 윤석열 검찰총장엔 “악마에 영혼을 판 파우스트”, 야당 의원엔 “지라시 만들 때 버릇”이라 비판하며 초강경파로 변했다. 우원식 의원은 월성 원전 자료를 삭제한 공무원이 구속되자 “인내의 한계를 느낀다”며 법원까지 공격했다.

당정(黨政) 수뇌부에도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친문과는 결이 달랐던 이낙연 대표는 “윤석열 총장은 거취를 정하라” “국정조사도 추진하겠다”며 추미애 장관의 손을 들어줬다. 공수처법 개정안과 경제 3법, 대북전단금지법 등도 밀어붙이겠다고 했다. 평소 합리적이란 평가를 받아온 정세균 총리는 원전 수사를 받는 산업부를 찾아가 직접 공무원들을 격려하는 이례적 행보를 했다.

8·15 집회 참가자들을 “살인자”라고 한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법원행정처장에게 “살려주십시오 해보라”고 한 박범계 의원의 발언은 양념 맛에 취한 오만함의 발로다. 여당 의원들은 뒤에선 “추 장관이 잘못했다”면서, 아무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않는다. 청와대와 문빠들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내년 서울·부산시장 선거와 당대표 선거, 대선 경선 판도를 좌우할 수 있다. 이낙연 대표와 가까운 한 의원은 “정부 인사(人事)도 정책도 난맥인데, 청와대와 문빠들 때문에 소신대로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여권 고위 인사는 “국정이 꼬이는데 말은 못하고 정말 고민이 많다”고 했다.

여권 전체가 양념 바이러스에 감염된 근본 원인은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내가 하는 일은 정의롭고 문제도 없다’는 확신에 차있는 듯하다. 불리한 현안마다 되풀이되는 대통령의 침묵은 ‘그래도 내가 옳다’는 고집으로 비친다. 양념 부대들을 향한 무언(無言)의 지침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무오류(無誤謬)의 함정, 팬덤의 최면에 빠지면 국정 실패를 바로잡을 수가 없다. 홍위병들은 대통령이 힘 있을 땐 위세를 떨치지만, 결국 권력을 병들게 하고 국민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문 대통령이 양념의 환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20년 집권’ ’100년 정당’의 꿈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