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젠' 모델로 2차 대전 이후 세계 산업계의 모범이었던 일본과 독일이 쇠락해가고 있다. 두 나라가 미국과 중국이 선도하는 신산업을 키우지 못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구글 제미나이의 이미지.

시가총액으로 세계 30대 기업을 하나라도 품고 있는 나라는 7개국이 전부다. 미국·한국·중국·대만·사우디·스위스·네덜란드. 이 중 선진국 클럽인 G7의 일원은 미국뿐이다. 일본·캐나다에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까지 G7의 나머지 6개국은 단 하나의 상장사도 기업 가치 세계 30위 안에 올려 놓지 못한다. 유럽 맹주들이나 일본의 힘이 빠졌다는 게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상대적인 퇴보의 폭은 한때 제조업 신화를 썼던 일본과 독일에서 큰 편이다. 일본은 세계 시장을 휩쓸던 기업들의 기력이 쇠한 채 도요타 한 곳만 시가총액 50위 안에 들어간다. 2023년 이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으로 충격이 컸던 독일은 시가총액 60위 안에 들어가는 기업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격세지감이다.

일본과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산업 생산의 교본을 썼다. 두 나라의 강점은 제조 공정 완성도를 99%에서 100%로 끌어올리려는 ‘가이젠(改善)’의 마법에 있었다. 오차를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하며 완벽에 가까운 품질을 지향했다. 일본의 ‘쇼쿠닌(장인)’과 독일의 ‘마이스터(명장)’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2010년대에 모바일 전환이 이뤄지고, 2020년대에는 AI가 인간의 삶에 들어왔다. 현란한 속도로 무대가 바뀌는 가운데 ‘제자리에서 갈고 닦는’ 가이젠 모델에 대한 찬사가 어느새 사라졌다. 미국·중국이 디지털 플랫폼, 자율주행, 생성형 AI 등에서 새로운 운동장을 만들며 막대한 이익을 선점하는 동안 일본·독일은 답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의 정점에 있던 일본 전자산업은 모바일 전환기에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알아보지 못하다 무너졌다. 내연기관차의 ‘기계적 완성도’를 자랑하던 독일은 자동차가 ‘전기로 달리는 컴퓨터’로 넘어가는 흐름을 놓쳤다. 한 우물만 판다는 건 동네 우동집에는 아름다운 스토리겠지만, 이제 기업의 차원에서는 과연 미덕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1879년 에디슨이 전구 상용화에 성공했을 때 유리 벌브를 만든 미국 코닝은 147년이 흐른 지금은 AI 데이터용 광섬유 세계 1위 기업이다. 이런 혁명적 변신은 가이젠 모델에서는 꿈꾸기 어렵다.

변화에 굼뜬 일본과 독일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사회 모델을 유연하게 가져가는 게 필수다. 일본·독일은 고용이 안정적이다. 특히 일본식 평생 고용은 대단히 선진적인 시스템으로 떠받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잘리지 않는 직장’에서는 실패를 무릅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지 않는다. ‘하던 일이나 잘하자’는 식의 위험 회피가 생존 요령이다. 새로운 피의 수혈도 더디다. 변화가 느릴 수밖에 없다.

한국은 새로운 운동장을 먼저 만들지는 못해도 흐름은 읽었다. ‘재빠른 운동장 갈아타기’로 아직까진 버티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호황에 가려져 있을 뿐 민간의 활력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다는 걸 직시해야 한다. 삼성전자 직원의 평균 근속 연수는 2004년 6.8년이었지만 2024년에는 13년으로 2배 가까이 길어졌다. 삼성이나 LG를 공무원처럼 다닌다는 ‘삼무원’ ‘엘무원’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는 건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변화와 혁신을 거부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요즘 SK하이닉스 직원들의 엄청난 성과급이 화제다. 일정 비율 저성과자의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 대신, 사회적 안전망을 두툼히 하고 큰 이익을 냈을 때 임직원에 성과를 듬뿍 나눠주는 고용·보상 시스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야 영혼 없이 쳇바퀴 도는 걸 중단하고 새로운 시도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한국은 ‘패스트 팔로어’란 수식어를 떨쳐낼 때가 됐다. 새로운 운동장을 먼저 만들어 제일 앞에서 달리는 나라를 지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