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史) 왜곡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2004년 9월, 서울에서 고구려사 국제 학술 대회가 열렸다. 참석한 중국의 동북 공정 주역 학자들 속에서 어두운 표정의 노(老)학자 한 명이 보였다. 옌볜대 발해사연구소장을 지낸 조선족 방학봉씨였다.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다” “고구려는 중국 역사가 다민족 대가정(大家庭)을 이뤄오는 과정의 하나였다”고 소리 높여 강변할 때 그는 대체로 침묵을 지켰다. 평생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연구했던 그 역시 같은 생각인 건가? 마침내 단상에 올라 질문을 받자, 방 소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논문에서 고구려의 성을 도성(都城)이라고 쓴 것은 한 국가의 수도라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인지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 정권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언급한 것이었지만 더 이상 말은 없었다. 이런 말조차 정치적 문제 때문에 돌려서 할 수밖에 없는 그의 존재가 마치 그 옛날 중국 땅에 남은 고구려 유민(遺民) 신세인 듯했다.

16일 중국 베이징 국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동방길금(동방의 상서로운 금속) -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 입구./연합뉴스

최근 중국 베이징 국가 박물관의 한·중·일 청동기 유물전의 한국 역사 연표에서 중국 측이 멋대로 ‘고구려’와 ‘발해’를 삭제해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학술 문제는 학술 영역에서 전문적인 토론과 소통을 할 수 있고 정치적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중국 베이징 국가박물관의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에 게시된 ‘한국 고대 역사 연표’. 표 왼쪽 ‘시대/왕조’ 칸 위에서부터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고조선, 신라, 백제, 가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라고 적혀 있고 고구려와 발해는 빠져 있다. /웨이보

과연 그런가? 중국의 동북 공정은 학자들의 ‘학술적 논의’가 아니라 그 시작부터 철저하게 정치적인 공작이었다. 1963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압록강 서쪽이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는 것은 황당한 논리”라고 했듯, 중국은 1970년대까지도 고구려가 한국사의 나라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자국 내 여러 민족의 역사도 중국사라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 본격화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중국 땅에 존재했던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는 얘기다. 이 논리대로라면 현 튀르키예 영토인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사도 바울은 튀르키예인이고, 현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출신 이마누엘 칸트는 러시아 철학자인 셈이다.

2002년부터 5년 동안 공식적으로 수행된 동북 공정의 주체 변강사지연구중심은 중국 국무원 산하 사회과학원의 한 기관이었다. 분명 국책 연구였다. 2004년 한·중 정부는 고구려사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구두 합의를 했지만, 지린성 사회과학원의 ‘동북사지’는 2017년까지 발행돼 역사 침탈을 계속했고 바이두 백과 등은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굳히기’ 작업에 들어갔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역사 침탈이 고구려와 발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연구서 ‘고대 중국 고구려 역사 총론’에서 백제와 신라도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했다”는 기사를 쓴 것은 2007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10년 뒤인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했다는 시진핑 중 국가주석의 말을 전했다.

이번 연표 왜곡 사태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 연표의 원자료를 제공한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이 고조선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이라고 적어 줬으나, 중국 측은 이것을 ‘고조선 연대: ?~기원전 108년’이라고 둔갑시켰다. 고조선의 전체 역사를 부정하고 자기들이 지방 정권이라고 보는 말기의 위만조선만 인정하겠다는 속셈이다.

중국은 끝내 이 연표를 수정하지 않고 떼어냈다. 트럼프가 들었다는 시진핑의 말처럼, 중국은 한국사 전체를 ‘속방(屬邦)’의 역사로 집어삼키려는 것이라고 볼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