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필 원고와 국어대사전, 돋보기가 놓여 있는 김형석 교수의 책상. /박돈규 기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내 정신이 내 신체를 업고 간다”고 말하는 철학자다. 그가 단어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명사가 잘 기억나지 않고 형용사와 부사도 점점 좁아진다”고 했다. 문장력은 어느 높이에 오르면 수준이 계속 유지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최근에 만난 김 교수는 “글을 풍부하게 하고 독자와 정서적으로 만나려면 형용사가 필요한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집필실 책상에 두툼한 국어대사전이 있었다.

101세 철학자는 여전히 매주 서너 번 강연한다. 책을 펴내면 베스트셀러가 된다. 김 교수는 “기억력은 약해져도 동사(動詞)는 마지막까지 안 잊어버린다”고 했다. 동사는 왜 예외일까. “죽기 전에는 누구나 ‘앓다’ 가잖아요. 하하하.” 따라 웃었지만 예로 든 동사가 ‘앓다’라서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말과 글은 망각이라는 공포와 싸우며 어떤 생각을 붙잡아 두는 행위일 수 있다.

국어사전은 여러 시대의 문화와 사유가 응축된 우리말 창고다.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을 보면 일상어는 명사가 30만514개(62%)로 가장 많다. 동사 9만8833개(20%), 부사 3만2482개(7%), 형용사 2만9250개(6%) 순이다. 일생 동안 사용하는 단어보다 쓰지 않는 단어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끝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동사처럼, 김형석 교수는 오늘도 강연하고 집필한다.

연극 '배를 엮다' /극단 즐거운 생활

얼마 전에 ‘배를 엮다’라는 연극을 보았다. 무대는 어느 출판사의 사전 편집부. 책상마다 사전이 수북했다. 이 연극은 인터넷과 모바일 사전에 밀려 사라지고 있는 종이 사전 편집자들이 주인공이었다. 사전 출간은 단행본⋅잡지와 달리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거꾸로 말하면 인기가 없고 존재감도 없다. ‘배를 엮다’는 일본에서 나오키상과 서점대상을 받은 미우라 시온의 소설이 원작이다. 연극은 사전 편집자들이 10여 년에 걸쳐 ‘대도해(大渡海)’라는 국어대사전을 새로 엮는 과정을 따라간다.

“자네, ‘오른쪽’을 설명할 수 있겠어?” 사전 편집부 선배들은 신입 부원을 이렇게 테스트한다. “방향인가요, 정치 성향인가요?” 그는 합격이다. 말의 바다는 넓고 사전은 그 바다를 건너는 배다. 대도해 프로젝트는 인력 감축과 편집 중단 같은 사나운 파도를 뚫고 나아간다. 말은 해마다 태어나고 소멸하며 끊임없이 형태가 바뀐다. 완벽한 사전은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종이 사전 편집자들은 마지막까지 가능한 한 많은 말을 채집하려 애쓰고 방치된 말을 찾아내 풀이를 붙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필요한 일이기에 오늘도 한다.

‘배를 엮다’를 보고 나오며 횡재한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기운을 계량할 수 있다면 올해 본 연극 중 가장 훈훈했다. 무언가를 열심히, 성실하게 해도 센스가 부족한 사람은 조롱과 놀림을 받는 세상이다. ‘배를 엮다’는 변화에 적응하면서 책임을 다하는 일의 아날로그적 가치를 뭉근하게 담아냈다.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응원가로 들렸다.

동사는 음식으로 치면 주재료에 해당하는 명사에 밀려 늘 찬밥 신세다. 그러나 동사는 “제 몸을 풀어헤쳐 문장 전체에 스며들어서 글맛을 낸다. 육수나 양념처럼 잘 쓰면 감칠맛까지 낼 수 있다.”(김정선 ‘동사의 맛’) 삿된 세상에는 주어 자리를 탐낼 뿐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명사가 많다. 동사는 정반대다. 낮고 구석진 자리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보통 사람처럼 동사는 끝까지 묵묵히 일한다. 그들 모두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연극 '배를 엮다' /극단 즐거운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