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시험이 코앞이다. 지난 18일 2021학년도 수능 시험을 앞두고 대구중앙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들이 마지막 학력평가 시험을 치르고 있다. 방역 가림막이 보인다. /김동환 기자

박근혜 정부 때 벌어진 일이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국어 분야 한 출제위원이 어느 소설에서 지문을 뽑아 회의에 참석했더니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닭이 나오는 작품은 빼는 게 묵계다. ‘장끼전’도 피할 정도다.”

국민 일부가 대통령을 ‘닭××’라는 멸칭으로 부르던 시절이다. 장끼는 꿩의 수컷. 닭을 닮았다고 꿩까지 싸잡아 금지됐다. 그 일을 겪은 출제위원은 “세금 받아 운영하는 국책 기관이라 알아서 기는 느낌이었다. 씁쓸했다”고 전했다.

조선 후기 소설 ‘서동지전’은 게으름뱅이 다람쥐가 부자인 쥐에게 구걸하러 갔다가 거절당하자 관가에 무고하였으나 오히려 쥐의 결백이 밝혀진다는 내용이다. 이명박 정부 때 평가원은 이 작품도 배제했다. 이유는 짐작할 것이다. 대통령이 ‘쥐××’으로 조롱당하고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쥐와 닭, 꿩이 해금됐다. 2018년 3월 모의고사에 김소진 소설 ‘쥐잡기’가 나왔다. 2020년 수능에선 닭이 등장하는 가사(歌辭) ‘월선헌십육경가’가 출제됐는데, 이전 정부라면 회피했을 지문이다. 문재인 정부에선 노동권이나 파업을 다룬 지문이 자주 나오고 있다. 풀이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고 누가 말했나. 어떤 공무원은 외풍이 불기도 전에 엎드린다. 자기 검열이다. 이번 수능 시험지에 가재⋅붕어⋅개구리가 없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금지 동물 이전에 금지 작가가 있었다. 이광수⋅최남선⋅서정주 등은 친일 행적 때문에 교과서에서 퇴출됐다. 반면 항일⋅친일⋅좌익 활동을 한 함세덕은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 재평가돼 교과서와 수능에 나온다.

이제 100원짜리 동전 속 충무공 얼굴도 바뀔 조짐이다. 동양화가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표준 영정에 대한 지정 해제 신청을 문화체육관광부가 심의 중이다.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 출품·수상했다는 기록이 그를 친일파로 몰았다. 한국은행은 표준 영정에서 해제되면 화폐 도안 변경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5000원권, 1만원권, 5만원권과 관련된 화가들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지목돼 있다. 이 지폐 3종의 도안을 바꿀 경우 약 4700억원이 든다.

조선미전은 일제강점기 미술학도가 화가로 입문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여기 출품했다고 친일파로 매도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가. 삶은 개인도 집단도 굴곡이 많고 복잡하다. 어느 시기, 어떤 얼룩을 짚어 예술가를 단죄하는 일은 야만적이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는 “정파적으로 어떤 걸 부각하고 어떤 걸 부정하거나 깎아내리는 게 문제”라며 “한국 사회가 무엇을 집단적 기억으로 삼을 때 좀 더 미래 지향적일 수 있는가 하는 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시비와 선악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보면 훨씬 더 당혹스러울 자료가 있다. 총독부는 1938년부터 식민지 조선 청년을 대상으로 지원병을 뽑았는데 해마다 경쟁률이 높아졌다. 1942년에는 4500명 모집에 25만4300명이, 1943년엔 5330명 모집에 30만3400명이 몰렸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친일파도 아니고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다수는 시국을 때로는 이용하고 때론 한탄하면서 살았다.

친일이나 친북에 문제의식이 있다면 교과서에서 지울 일이 아니다. 예술적으로 빼어난 작가가 왜 정치적으로 온당하지 않게 행동했는지 곱씹어 봐야 한다. 예술적 성취와 사회적 정의감이 늘 동행하는 것은 아니며 그런 모순이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왜 어떤 작가는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면서 문학적 게으름은 숨기는지도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균형 잡힌 교육이다.

100원에 새겨져 친숙한 이순신 표준 영정은 현충사 관리소에서 지정 해제를 신청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심의 중이다. 장우성 화백의 친일 의혹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표준 영정 지정이 해제되면 화폐 도안 변경을 검토할 계획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