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26일은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유럽에서 체르노빌은 오랫동안 거대한 비극으로 다뤄졌지만, 요즘은 사뭇 달라졌다. 더 이상 ‘재난의 상징’에만 가두지 않는 흐름이 뚜렷하다. 러시아에 의해 상처를 입은 에너지 주권을 회복하고, 폭등한 전기 요금을 낮출 가능성을 탐색하며, 기후변화에 맞서 탄소 중립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원전을 적극 껴안으려는 바람이 불고 있다.
1일 영국 런던에서는 민간 싱크탱크 주최로 원전을 전략 자산으로 삼을 수 있을지 논의하는 토론회가 열린다. 영국은 지난해 웨일스에 첫 번째 소형모듈원자로(SMR)를 짓기로 결정했고, 추가 원전 부지를 찾는 중이다. 이달 중순 불가리아 소피아에서는 ‘체르노빌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국제 콘퍼런스가 열릴 예정인데, 동유럽의 에너지 주권을 찾자는 의견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불가리아는 최근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신규 원전 건설 계약을 맺으며 동유럽 원전 허브를 꿈꾸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원자력 에너지 정상회의’에 참석해 “유럽이 원자력 에너지에 등 돌렸던 것은 ‘전략적 실수’였다”고 했다. 이날 EU는 2030년대 초까지 SMR을 가동하고 4세대 원전 배치도 앞당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탈원전 원조 국가로 꼽히는 스웨덴에서도 최근 신규 원전 건설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푸는 환경법 개정안이 의회에 제출됐다. 석탄 발전 의존도가 높은 폴란드는 올해 안에 첫 번째 원전 부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유럽에서는 러·우 전쟁 이후 전기 요금이 폭등하는 바람에 에너지 수급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가계와 기업이 버티기 어렵다는 데 공감하는 이들이 늘었다. 독일·영국·이탈리아의 가정용 전기 요금은 한국보다 3배 이상, 중국보다는 5배 이상 비싸다.
사고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내고 있다. 체르노빌 이후 유럽에서는 40년간 인명 피해가 발생한 원전 사고가 없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안전 기술로 재앙을 미리 차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쌓였다. EU 내 모든 원전은 극한의 자연재해나 비행기 충돌과 같은 비상 상황을 가정한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하고 있다. 체르노빌 때는 없던 폭발 시 방사능을 가두는 격납 용기도 모든 원전이 갖추고 있다. 근년에 설계된 원전들은 AI를 활용한 이상 징후 조기 발견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인간의 실수가 재앙으로 번질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낮췄다.
체르노빌 40주기를 맞은 올해 역설적으로 유럽은 탈원전 기조를 뒤집는 ‘원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유럽이 원전 생태계를 복원하려고 애쓰는 지금이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운영 능력을 검증받은 한국에는 천재일우의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