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방영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훗날의 세조)을 마치 왕권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인물처럼 묘사했다. 반면 희생자인 김종서와 황보인은 단종을 보위하는 충신이라기보다는 권력욕을 지닌 인물로 그렸다.
나약하고 겁 많은 단종이 숙부에게 옥새를 건네자 왕위까지는 바라지 않던 수양대군이 마지못해 그것을 받는 장면은 너무 심하다 싶었다. 사실 이런 식의 역사 해석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봤을 5공의 고위층은 김종서에게서 정승화를, 수양대군에게서 전두환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40년 넘게 세월이 흐른 지금, 쫓겨난 단종과 그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1000만 관객 초읽기에 들어갔다. 실제 역사를 크게 비틀었을 뿐더러 영화 자체로 그렇게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상당수 평론가들이 60점에 해당하는 별 세 개를 줬을 정도다. 그러나 관객 반응은 뜨겁다. 단종 관련 동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지는가 하면,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을 찾는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사정을 잘 모른다면 ‘21세기에 웬 난데없는 충군(忠君)과 절의(節義) 이데올로기인가’ 하겠지만, 꼭 그렇진 않다. 영화는 육지 속의 섬과 같은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이 자유롭게 그곳을 빠져나와 백성과 만나 교감하는 데서부터 일종의 판타지가 된다. 실제로 단종은 백성과 접촉할 수 없었지만, 영화는 임금과 백성이 서로를 지켜 주며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는 이상적인 리더십을 희구한다. 대체로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로 보인다.
하지만 흥행의 핵심이 과연 이 같은 정치적 요소에만 있는 것일까? 다른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공정(公正)’이다. 젊은 관객들은 삼촌 세조에 의해 쫓겨나 죽은 단종에게서 ‘자격이 있음에도 기성세대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청년층’의 모습을 보는 셈이다. 오래전 회사에 입사해 간부로 승진한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스펙도 뛰어나지 않고 고생도 덜했는데 승승장구하며 ‘내 일자리’를 찬탈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 위에 겹친다. 그들은 대부분 ‘삼촌’뻘이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위로(慰勞)’다. 영화 속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유배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동안 밥 한술 뜨지 못하던 단종은, 백성들이 십시일반 준비한 정성 어린 밥상을 받은 뒤 점차 심신을 회복하고 웃음을 되찾는다. 1984년 ‘설중매’ 방영 때가 어른이 ‘넌 왜 그것밖에 못 하느냐’고 윽박지르는 시절이었다면, 2026년 ‘왕사남’ 시절의 어른은 ‘힘들지? 기운 내’라며 토닥여 주는 모습으로 그 상(像)이 바뀌었다는 얘기다. 영화는 종종 시대상을 반영한다. 영화의 흥행은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