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학생 기자 때 대학 총학생회와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담당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까지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이들의 노력이 있다. 학생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으로 데려오려는 투표율 제고 운동이다. 회장 선거 때 개표 요건(투표율 50%)은 그들 표현대로 “달성해야 하는 당면 과업”이었다.
남북 협력·반자본주의 같은 슬로건을 내건 소위 ‘운동권’의 시대가 저물고, 사회 갈등·취업난 등 닥친 현실 문제부터 풀자는 ‘비권’으로 옮겨가는 밀레니엄 전후의 시기였다. 운동권 총학생회가 맥을 이으려면 학생의 투표 참여가 절실했다. 이들은 종이 대자보에서 인터넷 게시판으로 여론전의 전선을 넓혔고, ‘투쟁’보다는 말랑한 선거 문구와 세련된 옷차림으로 홍보물을 제작했다.
요즘 대학가도 투표율은 뜨거운 감자다. 지난 9일 연세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단독 출마한 후보가 투표율 50.57%에 득표율 83.79%(8538표)로 당선됐다. 그런데 엿새 만에 당선 무효 처리됐다. 후보가 개표 요건인 투표율 50% 달성이 어려울 것 같자 학내 다른 조직을 이용해 투표하라는 메시지를 대량으로 무단 발송했다가 내부자의 폭로로 적발됐다. 앞서 경희대 총학 선거에서도 투표 요건을 맞추려는 부정 행위로 당선이 취소된 일이 있었다. 대학 커뮤니티엔 “개표 요건·의결정족수가 무슨 필요냐”는 말이 올라왔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논하며 자성의 목소리도 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여의도도 투표율 문제로 시끌했다. 민주당이 당 대표·최고위원을 뽑을 때 대의원·권리당원 모두 1인 1표를 주도록 당헌·당규를 개정하는 안에 대해 전 당원 투표를 했다. 정청래 대표가 추진했다. 찬성표가 86.81%가 나와 개정안을 중앙위로 올렸다. 그런데 당내 비난이 잇달았다. 다수가 찬성하는 것 같지만, 투표율은 164만5061명 가운데 27만6589명인 16.81%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실제 찬성표는 전체의 14.58%(약 24만명)로 7분의 1 정도였다. ‘꼬리’가 당헌 개정안을 주도한 꼴이었다. 그 꼬리로는 강성 지지자인 개딸들이 지목됐다.
학생회도 정해놓는 개표 요건과 의결 정족수 규정이 민주당에 없어 생긴 촌극이었다. 민주당 한 중진은 “1인 1표제를 하려면 의결 정족수 조항을 신설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한 듯, 지난 5일 의원과 원외 지역위원장, 원로 고문 등으로 구성된 중앙위는 1인 1표제를 부결시켰다.
그러나 정 대표는 이를 내달 재추진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정 대표의 내년 연임에 유리해서, 당원 주권을 위해서 등 여러 말이 들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개딸들은 더 강한 ‘꼬리의 힘’을 안겨줄 1인 1표제는 적극 지지하지만, 소수의 점령과 횡포를 막아줄 민주주의의 ‘안전핀’인 의결 정족수 조항의 신설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