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 이틀째이던 지난 1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제헌 의원과 박정희 시대 야당 몫 국회 부의장을 지낸 백봉(白峰) 라용균(1895~1984) 선생의 삶을 재조명한 책 출판회가 열렸다. 여의도는 국감치고도 유난히 시끌시끌했다. 전날 현직 대법원장이 법사위원장에 의해 이석(離席)할 권리를 빼앗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한 비례 초선에게는 ‘조요토미’ 짜깁기 사진과 부박한 언어로 조롱당해 “가장 천박(금태섭 전 의원)” 등 거친 질타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여야 의원들은 짬을 냈고, 문희상 전 국회의장, 정대철 헌정회장 등 100여 명이 자리했다.
고(故) 김근태 전 의원 보좌관 출신인 이기헌 민주당 의원은 이날 축사에서 두 손을 모아 고개부터 숙였다. 그는 “국회가 전쟁터처럼 변했다”면서 “정치에서 인간관계의 기본, 배려가 사라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봉은 야당 지도자면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고 품위를 잃지 않았다”고 했다. 박홍근 민주당 의원도 “요즘 정치가 너무 팍팍해져 정치인들이 활로를 찾으려 무리한다”면서 “사납고 거친 언사가 난무하는데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정치 상황이 녹록지 않다. 선배님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책을 보면, 백봉은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상대를 배척하거나 매도하지 않았다. 일례로 장면 선생이 1960년 총리가 되기 직전 백봉 집을 다녀갔는데 이후 아들 라종일이 백봉에게 ‘다마오카상 왔다 갔습니까’라고 조롱했다. 그러자 백봉은 크게 꾸짖으며 “우린 땅이 있어 먹고살았지만 장면 박사는 사회생활을 하려면 창씨개명을 안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백봉은 민주당 구파로서 당시 장면 등 신파와 골이 깊었지만 상대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백봉은 “국회에서 서로 싸우더라도 반대 진영과 손을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며 의회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60여 년이 흘러 소위 민주화를 이뤘다는 오늘날의 국회는 어떤가. 의원들은 사적으로 주고받은 욕설 문자를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공개한다. 카메라 뒤에서는 멱살 잡고 “옥상으로 올라와”라며 막말을 서슴지 않는다. 말초적 반응이라도 얻을 요량으로 안면몰수하고 국감장을 ‘쇼츠 촬영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백봉재단은 12월이면 그해 가장 모범적으로 의정 활동을 한 의원에게 ‘백봉 신사상’을 준다. 권위 있는 상이다. 그런데 요즘 이걸 줄 의원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줬다가 “이런 의원에게 왜?”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기자도 얼마 전 후보 추천 설문지를 받았는데 정직·헌신 등 항목마다 적격한 의원 찾기가 어려워 난감했다. 올해는 과감하게 시상을 건너뛰어 22대 국회의원 전원에게 죽비를 후려치고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하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