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오른쪽)가 지난 2014년 2월 방한했을 때 국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작품전을 찾아 그림을 선물받고 있다.

최근 별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는 ‘담화로 과거사를 반성한 양심적 지도자’로 인식돼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각별한 추모 성명을 낸 것도 이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1995년 8월 식민지 통치 사죄 담화가 유명하지만, 한 해 전 발표한 ‘전후(戰後) 50년을 향한 담화’도 주목해야 한다.

무라야마는 이 담화에서 “소위 종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 재차 진심으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말씀드린다”고 했다. 이후 그는 피해자를 위한 민간 기금 설립을 구상했고, 1995년 7월 ‘아시아 여성 기금’이 만들어졌다. 많은 한국인에게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꼼수’로 각인됐던 기금의 근황이 궁금해 홈페이지를 찾아봤다.

2007년 해산됐지만 ‘디지털 박물관’의 형태로 그간 상황을 한국어로도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한국 관련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2004년 기준 위안부 피해자는 204명, 생존자는 135명. 당초 적극적이었던 기금에 대한 한국 정부 평가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정부 태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현 정의기억연대)가 전개한 강력한 반대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기금에 대한 피해자들의 태도 역시 다양했다. 비판·거부하는 생각을 가진 분, 불만은 있어도 받아들인다는 분, 심지어 수령 의사를 밝혔다가 비판·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거부 의사를 재천명한 경우도 있었다.’

최종 기금 수령자 7명에 대해선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면서 “사과금 전달이 피해자에 대한 압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피해자와 기금 모두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고 했다. 한국 내 사업은 1999년 중단됐다. 불편하게 읽히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외교 갈등이 일지 않은 것을 보면 대체로 사실에 부합한다고 짐작된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우리는 피해자들을 충분하고 합당하게 대우했을까. 횡령죄는 확정되고 후원금 반환 소송 중인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사건’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럼 우리는 왜 그토록 단호했을까. 시대 상황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 공개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 문제가 국가적 관심사가 됐다. 그해 방영된 TV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등 위안부를 고통스럽게 그린 대중매체도 국민 정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결국 관련 단체·운동가의 영역이 성역화되면서 일탈로 이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당시 국가와 사회가 좀 더 차분하고 냉철하게 대응했다면, 위안부 문제가 어정쩡하게 봉합된 지금보다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강성 보수로 평가받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취임에도 ‘한일 협력’을 중시하는 기대가 우려를 압도하는 국내 분위기를 보니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위안부 문제는 국가 간 현안 해결에 감정보다 합리적 사고가 필요함을 일깨워 준다. 앞으로 대일 외교에 아픈 교훈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