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성미가 괄괄한 친구 셋이 술자리에 모였다. A와 B가 정치적 논쟁 끝에 싸움이 붙었다. C가 가만히 듣다 보니 A 말이 옳다고 판단돼 함께 B를 공격했다. 나중에 술집 주인이 와서 뜯어말리는 걸 보고서야 C는 아차 싶었다고 했다.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때 A와 B를 제대로 말릴 사람은 그 자리에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C는 다친 뒤였다.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벌어진 ‘예송 논쟁’은 예법을 주제로 삼아 남인과 서인 당파가 주도권을 놓고 싸운 고도의 정치투쟁이었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사화(士禍)처럼 대규모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당초 장남이 아니었던 효종 임금이 죽었는데 장남으로 대우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1차 예송 논쟁의 주제는 미묘했다. 효종의 아들인 현 임금 현종의 정통성 문제를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2차 예송 논쟁 끝에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한 남인이 일시적으로 주도권을 잡기는 했지만, 현종은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두 당파의 완충 역할을 했다. 조선 당쟁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북인 세력이 궤멸된 이후 모든 당파가 부침 속에서도 어느 정도 세력과 명맥을 유지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엔 어떤 당파에도 속하지 않는 주요 정치 세력인 ‘국왕’의 역할이 컸다. 사림파나 북인을 다 때려잡겠다는 17세기 초까지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당파 간 세력 균형을 모색함으로써 정국 안정을 지속적으로 도모한 측면이 있었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최근 저서 ‘벼랑 끝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에 이렇게 썼다. 과거 대한민국엔 여야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 완충 장치인 ‘연성 가드레일’이 있었다. 야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도 대통령과 여당의 국정 주도를 인정하고 견제와 비판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지금도 그런가? 국정 주도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고 갈등한 결과 정치는 파국에 이르게 됐다. 정치적 관행이 붕괴했다는 것은 지금 같은 정치적 위기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1일 “지금 대한민국이 해방 정국 반민특위 상황과 비슷하다”는 여당 대표의 말을 듣고 놀랐다. 반민특위에 대한 역사적 해석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이 ‘반민족 행위자’로서 척결 대상인 반면 자신들은 칼자루를 쥐고 단죄하는 자리에 있다는 도식적이고 호전적인 논리 때문이었다.
이것은 견제와 균형의 여야 관계가 아니라 코너에 몰린 상대방을 아예 절멸(絶滅)시켜 버리겠다는 초토화(焦土化) 작전의 판타지로 읽힌다. 사실상 정치 독과점 체제가 되고 나면 그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정치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인조반정 이후 좀처럼 보지 못한 어느 한 순간에 다가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