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샐 틈 없는(no daylight)’ ‘철통 같은(ironclad)’ ‘피로 맺어진(born in blood)’….

한미 동맹 하면 따라붙는 외교 수사다. 어느덧 너무 익숙해져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고 별다른 광물 자원도 없던 작은 나라 한국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강하고 부유한 미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상호방위조약’이란 파트너십을 체결한 것은 기적이었다. 세계 시총 1위 엔비디아가 순위도 매길 수 없을 정도의 무명 비상장사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기술 협력 관계를 맺는 식의 이해불가한 계약이었다.

6·25전쟁 정전 기념일이던 지난 27일 미 국무부는 논평을 냈다. “오늘 우리는 한국 전쟁 영웅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기 위해 잠시 하던 행동을 멈춥니다.” 백악관은 이를 트위터에 다시 한번 올리며 전 세계에 알렸다. 그렇게 한미 동맹의 정신은 절정에 다다랐을 그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은 미국에 수모를 겪고 있었다. 새 정부 첫 경제부총리인 구윤철 기재부 장관이 관세 협상을 위해 약속을 잡고 지난 24일 처음으로 방미 길에 오르려 했지만 출국 직전 인천공항에서 ‘이메일’로 회담 취소 통보를 받았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0일 백악관에서 마코 루비오 국가안보보좌관 겸 국무장관을 기다렸지만 결국 그를 만나지 못했다. 워싱턴 DC에 있던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을 만나기 위해 그의 뉴욕 사저까지 찾아가야 했다. 협상은 30일(현지 시각) 가까스로 타결됐지만 그 과정에서 “동맹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느냐”는 원망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만난 한 원로 외교관은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면서 워싱턴 DC로 나가는 후배 외교관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한미 동맹의 시각으로 미국을 보지만 말고 ‘미·한’ 동맹의 시각으로도 한국을 바라보려 노력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미국은 유일 혈맹이지만, 미국에 한국은 영국·일본·호주·필리핀·대만 등 여러 동맹 중 하나이기에 ‘한반도 천동설’ 식의 사고로는 제대로 된 대미 외교를 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동맹들이 우릴 뜯어먹었다(ripped off)”는 트럼프의 거친 언사는 당혹스럽다. 하지만 미국이 오랫동안 ‘쌍둥이(무역·재정) 적자’와 ‘트리핀 딜레마(국내외 유동성 동시 관리)’에 시달린 것 또한 사실이다. 최근 고위급 협의에서도 미 측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상호’에 밑줄을 쫙쫙 그으며 한국이 인도·태평양 전략 등 미 정책에 더 참여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관세 협상은 시한을 코앞에 두고 일단락됐지만 주한 미군 역할 재조정, 국방비 인상 등 ‘한미 동맹의 현대화’라는, 다시 말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안’ 협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최우방인 미국과의 협상, 날씨는 맑지만 파고(波高)는 높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