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오징어 게임 3’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드라마 아닌가요?” 지난주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3’가 공개된 뒤 한 게시판에 오른 댓글이다. 시즌2부터 달라진 것은, 다음 게임의 속행 여부를 놓고 참가자들이 투표를 벌이는 부분이다. 시즌3에서 주최 측은 이것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이라고 강조하는 한편, 반란에 실패한 참가자들의 시체를 통로에 걸어 놓고 “공정하고 평등한 게임의 룰을 거부한 결과”라고 선전한다.
과연 그것이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인가? 주최 측은 게임장으로 끌려온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어차피 게임은 속개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상당수는 다음 게임에서 숱한 사람이 죽을 것임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돈에 눈이 멀어 찬성표를 눌렀고,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됐다.
많은 학자가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다수결 원칙이라는 것은 힘을 가진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묵살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이진우) “의외로 많은 사람이 다수결을 만능 원리로 알고 있지만, 소수 의견이라 해도 억압하지 말고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다.”(강원택) “다수가 선(善)이고 소수가 악(惡)이라는 거짓을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다.”(송호근) 다수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끝까지 설득과 토론을 거쳐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체제일수록 오히려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을 현실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북한의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이것은 다수로 상정된 의견에 소수가 완전히 억눌리거나 존재 의미를 상실한 체제다. 오래전 금강산에서 만난 한 북한 감시원은 “인민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복잡한가”라며 남한의 정치가 답답하다는 말을 했다. 그 ‘인민’들의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이해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현실이라고 크게 다를까. 일단 ‘다수’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차지한 세력은 ‘소수’와 대화와 토론을 거치는 대신 그들을 일방적으로 억압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는 모습을 우리는 지난 수십 년 정치사에서 익히 봐 왔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은 과연 이런 민주주의 체제의 취약점을 풍자하는 작품이었을 수도 있다. 지도자가 제 역할을 못 했을 때의 위험성 역시 드러난다. 시즌2에서 참가자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게임을 시작한 주인공 성기훈(이정재)은 시즌3에선 공황 상태에 빠져 별 역할을 못 한다. 마지막 게임에선 9명 중 최다 6명이 생존할 수 있었는데도 특정 참가자를 지키겠다는 고집 때문에 8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빚었다. 이제 민주주의 체제에는 어떤 보완 장치가 필요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