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코스피와 원화 환율 주간 종가가 표시돼 있다. 이날 주간 시장 마감 후 환율은 1520원 선을 뚫고 올라갔다. /연합뉴스

환율이 달러당 1520원을 뚫고 올라갔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설정한 ‘방어선’이 1480원이었다고 했는데 한참 멀어졌다. 한 외환 시장 전문가는 “요즘 청와대에서 환율 챙기는 사람이 있나 싶다. 마침 중동 전쟁이 터지니 홀가분하게 그 탓으로 다 몰아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가장 현실적 안정화 조치로 거론되는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는 “거절당해서 못 한다”(구윤철 경제부총리)고 포기한 모양이다.

환율이 급등하기 시작한 지난해 가을 즈음 정부는 개인의 미국 주식 투자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지난해 11월 이른바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채권 순매수액이 61억달러로 사상 최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달 들어선 해외 투자 규모가 쪼그라들었는데도 환율이 무섭게 치솟고 있다. 해외 투자가 아닌 중동 전황(戰況)이 움직이는 시장으로, 장세가 뒤집혔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한 와중에도 정부는 여전히 서학개미와 싸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고환율을 막겠다며 허겁지겁 내놓은 ‘국내 시장 복귀 계좌(RIA)’를 올해 내내 끌고 간다고 한다. 해외 주식을 팔고 이 계좌로 옮겨 1년 이상 원화 자산에 투자하면 양도세 22%를 면제해 준다는 제도다. ‘서학개미 컴백 계좌’로도 불린다. 관련 세법 개정안 통과 전인데 정부 압박으로 증권사들이 서비스를 먼저 출시했다.

투자자 반응은 시큰둥하다. 전쟁 여파로 미국 주가가 많이 내려 팔기 좋은 시점이 아닐뿐더러 1년 동안 사실상 돈이 묶인다는 부담이 크다는 평가다. 한 지인은 “이참에 해외 주식 팔아 빚이라도 갚을까 했건만 대출 상환은 대상이 아니라 해서 그만뒀다”고 했다. 규정상 한국 주식·예금 등에만 넣어야 하는데, 코스피는 이미 많이 올라 부담스럽고 예금은 이자가 너무 낮아 내키지 않는다고 한다.

정부는 혹시 다시 해외 투자를 하는 ‘꼼수 개미’가 있을까 신경이 곤두선 모습이다. 연금을 포함한 그 어떤 다른 계좌에서도 1년간 해외 투자를 하면 세금 면제액을 깎는다는 일종의 벌칙 규정을 막판에 추가했다. 면세 한도는 총 매도액 기준 5000만원으로, 주식이 두 배 올랐다 치면 500만원 정도 세금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1년간 해외 투자를 금지당할 정도로 가치가 있을까. 대부분 갸우뚱한다.

/한국은행

보다 근본적으로, 국민의 달러 자산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쪼그라뜨리는 정책이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경제에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이 발생하거나 원화가 투기 세력의 공격을 당할 때 국가의 외화 자산은 방어막이 되어준다. ‘국가’엔 외환보유액을 운용하는 한국은행뿐 아니라 기업과 개인도 들어간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민간이 쌓아둔 외화 자산까지 포함해 국가 전체의 대외 지급 능력을 평가한다. 지난해 말 기준 개인의 주식·채권 투자액은 약 2100억달러로 외환보유액의 절반 수준에 달한다. 달러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갑작스러운 외환 위기가 닥칠 경우 ‘금 모으기’ 대신 ‘미국 주식 팔기’ 운동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오만 가지 변수로 움직이는 지금의 환율만 보고, 무조건 팔고 들어오라 부추기는 정책이 최선인지 깊이 생각해볼 문제란 뜻이다.

이재명 정부 내에선 지난해 내내 계엄 때 환율인 달러당 1480원대 이상은 막아야 한다는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해외 주식 양도세 면제는 환율이 달러당 1480원을 넘긴 무렵 공개됐다. 마음이 급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서학개미 컴백 계좌’는 행정 비용 들여 몇몇 세금만 깎아주고 실효성은 없는 소모적 정책에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너무 높은 환율은 물가를 끌어올리고 양극화를 악화시키는 등 부작용이 커서 대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지금 엉뚱한 전선(戰線)에 가서 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