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논설주간

조선일보사 건물 앞에 이따금씩 들르는 시위 행렬이 있다. 부정선거 보도를 촉구하는 무리도 그중 하나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다. 조선일보는 왜 보도하지 않나.” 비겁하게 진실을 외면한다는 질책으로 들린다. 때로 뛰쳐나가 항변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어디서부터 취재를 시작할까요. 전국 1만4000개 투표소 중 아무 곳이나 골라서 주변 CCTV를 몽땅 뒤질까요. 표 도둑질하는 사람들이 보이는지.”

수사나 취재나 마찬가지다.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은 출발점이 필요하다. 확실한 증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듯한 실마리는 있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운데 몇 개라도 퍼즐 조각이 있어야 나머지를 맞출 수 있다. “총선에서 A당이 부정하게 표를 얻은 게 확실하다”라고 막연하게 주장하면 그 당 대표를 멍석 위에 꿇어 앉혀 놓고 “네 죄를 고하렸다”고 사또 재판을 하라는 말밖에 안 된다. 무책임한 문제 제기다.

작년 1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공수처에 체포되면서 배포한 국민께 드리는 글에서 “부정선거의 증거는 너무나 많다”고 했다.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다수 발견됐는데, 살인범을 특정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살인 사건을 음모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가령 어떤 선거구에 등록된 유권자 수는 5만명인데 투표했다고 신고한 인원은 6만명이라든지, 투표했다고 신고한 인원은 3만명인데 기표된 투표용지는 4만장이었다면 “칼에 찔려 사망한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고 할 만하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전한길 전 한국사 강사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딱 부러지게 말했으니 그 정도의 구체적인 정황이 나오나 싶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월 16일 헌법재판소에 나온 대통령 측 변호사들의 말은 딴판이었다. “대통령은 부정선거에 대한 제보와 의심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확신이 없더라도 의혹을 밝히는 것이 책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확신할 만한 증거는 없고 의심스런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부실한 선관위 시스템’을 그 첫째로 꼽았다. “국정원이 선관위 시스템을 모의 해킹해보니 선거 자료에 손 대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거 자료에 누가 손 댄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도둑질 당한 흔적은 찾지 못했지만 도둑이 마음만 먹었으면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담장이 낮았기 때문에 도둑질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황당한 궤변이다. 결국 윤 대통령도 취임 후 2년 반이 넘도록 수사에 착수할 단서를 못 찾았다는 얘기다.

부정선거 음모론이 불거진 것은 2020년 총선부터다. 사전투표함이 열린 새벽부터 수도권에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들이 줄줄이 역전당했는데 민주당과 미래통합당 후보들의 사전투표 득표 비율이 63대 36으로 나타난 곳이 많았다. 통합당 지지자들이“조작이 없었다면 이런 우연이 발생할 수 없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자. 민주당에서 조작을 했다면 굳이 득표 비율을 63대 36으로 통일할 이유가 없다. 그 비율로 맞춰야 조작이 용이해지는 것도 아니다. 기말고사 1등 한 학생이 전 과목에서 97점을 맞았다는 이유로 “조작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우연”이라며 성적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뭔가 의심스러운 구석 한두 개를 부풀려 의혹으로 몰아가는 태도를 음모론이라 부른다. 2023년 초 발생한 인천세관 마약 반입 사건을 수사한 검경합동수사반은 국가기관이 개입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백해룡 경정 홀로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내란 자금을 마련하려고 마약 독점 사업을 한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고집하고 있다. “수십 kg이나 되는 마약을 국내 기관 협조 없이 반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심증이 유일한 근거다. 지금의 부정선거 주장은 딱 백해룡표 음모론 수준이다.

다음 주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한국사 강사 출신 친윤(親尹) 유튜버 전한길씨가 맞붙기로 했던 ‘부정선거 맞짱토론’ 성사가 불투명해졌다. 생방송 진행 중에 검증이 어려운 주장이 오갈 위험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꼭 생방송 형식일 필요는 없다. 전씨가 전문가 3명과 함께 제시하겠다고 약속한 ‘부정선거 증거 자료’를 먼저 내놓고 이 대표가 반박하면 된다. 몇 차례에 걸쳐서라도 공방이 오가다 보면 국민이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선거 논란은 보수 진영에 파멸적 자해를 가하며 나라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 어렵사리 성사된 기회를 날리지 말고 소모적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