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 이종석 국정원장 등 정부 여당 내 ‘남북파’들이 김정은에게 남북대화를 간청하고 있다. 군 대북 확성기 전면 철거, 국정원 TV·라디오 대북 방송 중단, 한미훈련 축소 조정, 군사분계선 부근서 군 훈련 중지, 남북은 서로 다른 두 국가라는 북한 주장 수용 시사, 제재로 북핵 포기 안 된다는 정 장관 발언, 북한은 미국 타격 가능한 3대 전략 국가 중 하나라는 평가, 한미 대북 정책 공조회의 가동 중단 주장, 재외 국민들 북한 관광 희망 발표 등 마치 소나기처럼 구애가 쏟아졌다. ‘애걸복걸’이란 낱말 뜻 그대로다. 정부 초반에 벌써 남북파와 한미동맹 중시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도 남북파의 조급증 때문이다.
이들은 ‘남북대화를 하지 않으면 전쟁이 날 수 있고 그러면 경제가 파탄난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안전이 밥이고 평화가 경제”라는 언급이 그 얘기인데, 어떤 말이든 목적에 맞춰 단순화해 과장하면 왜곡이고 선전이 된다. 과거엔 군사 정권이 ‘북한 위협’ ‘전쟁 가능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는데, 이제는 민주당이 그렇게 하고 있다. 북한 위협은 늘 있었고 그 속에서도 우리 경제는 성장해 왔다. 앞으로 갑자기 달라질 특별한 이유는 없다.
민주당 정권이 유독 남북대화에 목을 매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친북 흐름을 이끌었던 세대가 이제 노령화로 접어들면서 초조해진 것 같다. 또 남북 이벤트는 국내 선거에서 민주당에 호재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재명 정부에선 남북 대화가 대북 불법송금 사건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효과를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간청하는데도 김여정은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정부는 김정은이 이러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협상용 강경론일 것으로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은 그동안 남쪽 민주당과 해온 모든 거래가 결국 자신들에게 큰 피해가 됐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민주당 정권에서 막대한 달러와 쌀, 현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을 받았지만 그로 인한 이득보다 북한 사회에 ‘잘사는 한국’에 대한 선망이 퍼져나간 부작용이 훨씬 심각하다는 인식이다.
김씨 정권은 북한 주민 수십만이 굶어 죽어도 얼마든지 견딘다. 그러나 자신들 정권에 위협이 되는 일엔 작은 징후라도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 남조선 민주당과 거래하며 북한 주민들에게 철저한 정보 통제를 하고 ‘장군님께 선물을 바쳤다’는 식으로 선전했지만 한국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개성공단도 그 소문의 진원지 중 하나였다. 김정은이 개성공단 내 남북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까지 한 것은 이유가 있다. 남북 교류의 뒷편에서 북한 내에 한국 드라마와 가요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북한 장마당에서 ‘한국산’은 ‘최고급’과 동의어가 됐다. 심지어 평양 지배층에서도 한국 가수들 평양 공연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씨 정권이 남쪽 민주당과 거래한 이후 탈북 행렬도 늘어났다. 탈북민의 한국행이 2000년대 들어 2배 이상 급증했다. 북한-중국 국경 지방에 탈북민 없는 마을이 드물다시피 하고, 북한 두메산골 노인도 ‘한국이 잘산다’는 걸 안다고 한다. 거미줄처럼 깔린 보위부원들이 이런 북한 주민 동향을 수집하고 있고 모두 김정은에게 종합 보고된다. 김정은 체제는 생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정은이 북한 내 한류를 단속하는 것은 단순한 기강 잡기가 아니라 생존 전쟁이다.
김정은은 ‘남조선’ 호칭을 ‘대한민국’ ‘한국’으로 바꿨다. ‘남조선엔 거지가 득시글거린다’는 거짓 선전도 ‘한국은 부익부 빈익빈’ 등으로 바꾸고 있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북한에서 ‘현실과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천지개벽과 같은 것으로 김정은만이 할 수 있다. 김정은은 현 상황에서 정권을 유지하는 길은 주민들에게서 ‘남북통일’ ‘한 민족’ ‘동포애’ 따위의 생각을 완전히 제거하고 ‘한국은 적대적인 다른 나라’로 세뇌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리고 남쪽 휴전선과 중국 쪽 국경을 이중, 삼중, 사중 철조망으로 틀어막았다. 나름 냉정한 전략적 결단이다.
북한 김씨들이 이런 냉정한 자세로 남쪽 민주당과의 20여 년 거래를 재평가한다면 민주당의 대북 구애가 ‘장기적인 흡수 통일 전략 아니었느냐’고 의심할 수 있다. 물론 민주당에 그런 김씨 왕조 붕괴 전략이 있을 리 없다. 김정은이 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민주당 의도와 상관없이 남북 교류 자체가 김정은 체제를 흔드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김정은이 절감하게 됐다. 지금은 김정은 입장에선 남북 대화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몸이 단 정부가 이런 김정은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파격적인 선물을 주려고 할 가능성이다. 대북 방송 중단으로 북한 주민의 눈과 귀를 막아준 것은 김정은이 정말 좋아할 일이었다. 그 이상 가는 것이 무엇일까. 정부 대북 담당자들은 온통 이 생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