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중에 조선 전기사(前期史)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한 명 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기존 학설과 다르게 주장하는 게 있다. 조선 왕조 최대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이 숱한 선비를 해친 사화(士禍)에 대해서다. 종래 사화는 기존 집권 세력인 ‘훈구파’와 새로 중앙에 진출하려는 선비 집단인 ‘사림파’의 충돌 결과 사림파가 대거 희생된 사건이라고 봤다.
친구의 주장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사화의 주도자는 국왕인 연산군이었다는 얘기다. 몇 달 전 다른 취재를 위해 전화를 했다가 그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국왕이 일부 대신과 합세해 삼사(三司)를 억압하려 했던 정치 투쟁이 바로 사화”라고 했다. 삼사란 무엇인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세 관청으로, 주로 관리 감찰과 탄핵, 임금에게 직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특별히 반(反)권력적 성향이어서가 아니라 본연의 업무가 그랬다.
“삼사의 위상이 커지자 연산군은 상대적으로 왕권이 제약받는다고 판단했고, 이들의 역할을 축소하려고 했지.” 그래서 일어난 첫 사화가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세조를 비판한 ‘조의제문’을 사초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빌미로 일으킨 1498년, 연산군 4년의 무오사화라는 것이다.
6년 뒤인 1504년 일어난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훨씬 끔찍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지만 ‘군자’와는 거리가 먼 연산군이 이 같은 ‘기획 복수’를 했다. 즉위 직후 생모인 폐비 윤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았지만 갑자사화까지 10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비판 세력인 삼사를 공격하려는 것이 주 목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오사화 이후 비판 세력이 약화되고 나서 왕권은 강화됐다. 하지만 개혁 같은 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임금에게 요구됐던 의무와 제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왕과 그 주변 인물에 의한 정치적 전횡이 이뤄지는 가운데 무절제한 연회를 비롯한 사치·향락과 음행이 줄을 이었다. 갑자사화 다음 해인 1505년의 기록을 보면, 궁궐 뒤편에 곰과 범을 풀어 놓고 직접 사냥에 나섰는데 짐승이 줄어들자 ‘곰 한 마리를 잡아 오면 무사의 경우 근무 평정에 100일을 가산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깨에 곰과 범을 메고 도성으로 들어오는 자가 잇달았다는 것이 실록의 기록이다.
친구는 전화를 끊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사화는 일종의 실패한 검찰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어.” 권력에 대한 비판 세력이 약화되자 고삐 풀린 권력이 일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의 예라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아무리 비판 세력이 약화되더라도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의 일들을 가만히 보니 그게 기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검찰청이라는 기관이 아직은 존재하는 지금도 이 모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