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채권 시장을 충격에 빠뜨린 일이 지난주 일어났다. 한국전력공사가 발행한 채권이 ‘떨이’ 수준의 조건에 간신히 낙찰됐다. 한 채권 트레이더는 “정부가 보증하는 공공기관 채권이 이런 헐값에 팔린 적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이 사건은 최근 채권 시장의 불안한 실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된다. 국채 금리는 이미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주 한국 국채 금리 상승 폭은 주요국 중 가장 높았다(채권 금리가 오르면 가격은 내려간다).
요즘 큰 손실을 본 증권사 채권팀이 구조 조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채권은 주식만큼 대대적인 화제가 되지는 않지만 경제적 파급력은 더 클 수 있다. 채권 금리가 올라가면 가계·기업 대출 금리가 따라서 상승하고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비용도 불어나 경제에 전방위적인 악영향이 번진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채권 시장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었다. 단기적으로는 부동산 가격 상승 탓에 한국은행이 예상만큼 기준금리를 못 내리게 된 상황이 금리 급등을 유발한 원인으로 꼽혔다. 금리가 내려갈 줄 알고 투자 전략을 짰는데 틀어졌다고 한다.
정부가 선방했다고 평가하는, 관세 협상과 연동된 대미(對美) 투자에 대한 불안감 또한 금리를 밀어올리는 악재로 지목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관세 협상 타결 후 “협상팀을 표창할 방법을 강구해 달라”고 했다. 채권 시장 참가자들은 이렇게 자축할 결과는 아니라고 걱정한다.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10년 할부, 기업 일부 부담 등은 얻어냈지만 내야 할 돈 3500억달러가 줄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외환 보유액에서 수익을 내 미국에 약속한 연 200억달러를 10년간 대겠다고 한다. “외환시장 충격 없이 감당 가능하다”는 이창용 한은 총재의 발언이 근거다. 외환시장만 고려해서는 안 될뿐더러 수익이 매년 난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돈이 모자라면 정부가 채권을 발행해 충당해야 한다. 채권 시장이 두려워하는 중장기적 위험이다.
설령 수익률이 좋아 돈을 보낼 수 있다 해도 기뻐할 일일까. 원래대로라면 수익금은 외환 보유액에 재편입되거나 한은 수익 혹은 국고에 더해진다. 대미 투자금으로 쓰면 결국 나랏돈이 빠져나가는 구조라는 뜻이다. 200억달러는 약 29조원, 올해 연구·개발 예산과 맞먹는다. 설상가상으로 환율까지 오르고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원리금 회수에 불확실성이 있는 사업은 착수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무조건 돈 버는 사업’에만 투자해 돈을 돌려받겠다는 의미다. 그런 투자처가 어디 있나. ‘100% 수익 보장’을 내세우면 허위 광고로 처벌받는다.
젠슨 황의 ‘깐부 회동’과 화기애애한 APEC 정상회의 뒤에 닥친 채권 시장의 암운은 한국 경제의 아슬아슬한 현실을 드러낸다. 정부는 25%일 뻔한 관세를 15%로 깎아 다행이라고 여기지만 이는 ‘트럼프식 계산법’이다. 냉철한 정부라면 한미 FTA로 0%였던 관세가 15%로 올라간 데 더 주목하고 기업과 함께 대비해야 한다.
이런 충격 없이도, 이미 위험 수위를 넘긴 한국의 국가 부채는 저출산·고령화 비용으로 ‘자동 급증’하게 되어 있다. 국채 발행이 불어날 일만 남은 초장기적 악재다. 정부는 현재 국가 부채(GDP 대비 53%)가 감당 가능한 수준이라는 입장이다.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준의 증가 속도다. 올해 10~11월 국채 발행 물량은 지난해의 1.5배 수준에 달하고, 내년도 늘어날 게 확실하다. 퍼주기 예산으로 나랏빚을 불리기엔 어느 때보다 부적절한 시점이란 뜻이다. 경제학 거장 루디 도름부슈는 “위기는 생각보다 느리게 오지만 일단 시작되면 상상보다 훨씬 빠르고 깊게 진행된다”고 했다. 채권 시장의 비명을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