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상호 관세 부과 시한을 하루 앞둔 7월 31일, 한국 협상팀은 초읽기에 몰리고 있었다. 미 상무장관은 “관세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한미 정상회담도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이 3500억달러 투자를 요구한 상태에서, “앞으로 검토해 나가자”는 잠정 합의가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3500억달러 투자를 약속받았다”고 기정사실처럼 공개했다.
3500억달러라는 수치가 세상에 알려진 과정이다. 우리 경제 규모는 일본의 절반을 밑도는데, 투자 금액은 일본이 약속한 5500억달러의 절반 이상이었다. 일본보다 못한 합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한미 관계는 덜컹대고 관세 협상 순서도 맨 끝으로 밀리면서 불안하던 차였다. 타결된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어차피 최종 조율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일본의 마무리 수순을 지켜보고 대응하면 된다는 쪽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5500억달러 그대로,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앞당겨 합의를 마쳤다.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3500억달러는 당초부터 우리가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리 외환 보유액의 80%에 해당한다. 그 돈을 한꺼번에 미국 주머니에 털어 넣으면 제2의 IMF 금융 위기에 내몰린다. 미국의 요구는 동맹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9월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측 요구가) 거칠고, 과격하고, 과하고,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타임지 인터뷰에서는 “정상회담 때 미국 요구대로 (3500억달러 투자) 합의에 서명했다면 내가 탄핵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3500억달러 대미 투자 거부 선언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지원 사격에 나섰다. “트럼프 정부의 날강도 압박, 길목을 막고 돈을 뜯어내는 깡패와 다를 바 없다” “트럼프의 깡패 짓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서슴없이 깡패라고 불렀다. 미국이 추가 압박에 나서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맞받았다. 이런 말들은 실시간으로 백악관에 전달됐을 것이다.
“3500억달러는 부당하고 수용 불가능하다고 보도해 달라”고 정권이 언론에 협조를 구한다는 말도 들린다. 반미(反美) 정서를 지렛대 삼아 미국을 움직이겠다는 전략이다. 반미는 정권 정체성에도 맞는다. 개딸들은 박수 치며 환호할 것이다. 미국 요구가 지나친 만큼 명분도 서고 폼도 난다. 우리가 익숙했던 다른 미국 대통령들이라면 통했을지 모른다. 트럼프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정부는 미국이 3500억달러를 고집하면 25% 관세를 맞고 말겠다는 각오인 듯싶다. 3500억달러를 퍼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트럼프에게 정면 승부를 걸면 25% 관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관세율을 50%로 두 배로 올릴 수 있다. 다른 품목에도 관세를 올리는 보복 조치를 할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다.
지난주 우석대 박노준 총장의 인터뷰를 읽다가 한 구절이 눈에 꽂혔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한, 우석대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게 최우선입니다. 학교발전기금을 내는 분이나 교육 당국 관계자에게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선 그분들 신발을 닦고 양말을 빨아드릴 자세가 돼 있습니다.” 박 총장은 선린상고 야구 선수 시절, 투수와 타자로서 모두 탁월했던 이도류(二刀流)였다. 여학생 팬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니던 수퍼스타 시절과 “가족을 위해 고개 숙인다”는 지금의 모습이 교차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 자리에 있는 한 대한민국 5000만 식솔을 먹여 살리는 게 최우선이어야 한다. 세상의 가장들은 삶의 현장 곳곳에서 ‘트럼프’들과 마주친다. 직장의 위계질서 속에서, 원청과 하청 간의 도급 관계 속에서 ‘트럼프’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 그 횡포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올곧고 정의로울 것이다. 대부분의 가장은 그러지 못한다. 자신에게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가족들이 눈앞에 어른거려서다. 그래서 인내하고 타협한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하소연도 못 한다. 혼자 분을 삭일 뿐이다. 이 대통령은 반미 선동으로 정치적 재미를 보려는 세력에 업혀 있는 동시에,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책임지고 있다. 둘 중 어느 쪽 입장에서 ‘3500억달러 문제’를 풀어 나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