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한때 안미경중(安美經中)이란 말이 유행했다.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라는 뜻이었다. 안보는 동맹인 미국과 같이 가는 것이 당연하고, 경제는 급팽창하는 거대 중국 시장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인식이었다. 일부에선 이 말이 중국과 패권 경쟁 중인 미국을 자극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측 반응을 보니 실제 그랬던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윤석열 정부 때는 ‘안미경미(안보도 미국, 경제도 미국)’라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대(對)중국 봉쇄에 나서자 중국 산업에 추격당하는 우리에게 숨 쉴 틈이 생겼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미국이 우리 기업들에 막대한 보조금을 주며 미국 투자를 요청할 때만 해도 정말 ‘안미경미’ 시대가 오는가 보다 했다. 모두 트럼프 재등장 이전에 꾸었던 꿈이었다.

트럼프가 유럽, 일본, 한국을 대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 유럽이 미국에 60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지만 27국이 나눠 지는 부담이다. 일본은 5500억달러이지만 미국과 무제한 통화 스와프를 가진 데다 해외 순자산이 워낙 많다. 그런데 우리는 통화 스와프도 없고 해외 순자산이 많지도 않다. 3500억달러는 우리 GDP 수준과 맞지도 않는다. 일본에 비교하면 우리는 2000억달러 정도가 맞는다.

트럼프는 강자와는 주고받기 거래를 하고 약점을 가진 상대에게는 가혹하다. 처음에 관세 폭탄은 중국을 겨냥한 것인 양하더니 시간이 흐르자 대중국 관세는 손에 쥔 모래 빠져나가듯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 미국 항구에 들어오는 중국산 선박에 별도 비용을 부과한다고 해 그 반사이익을 한국 조선업이 볼 것으로 봤지만 지금은 이조차 흐지부지된다고 한다. 반면 미국의 동맹국들에는 끝까지 완고하다. 트럼프에겐 미국의 동맹국들은 미국과 동맹이란 사실 자체가 큰 ‘약점’으로 보이는 것 같다.

경제 규모로 볼 때 3500억달러 현금 투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지만, 트럼프에겐 이것이 ‘적정 가격’일 수 있다. 트럼프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미군이 없으면 한국은 북한을 막을 수 없지 않으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미군 없으면 북한에 점령당하는 한국’은 안전 비용으로 1000억~2000억달러는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에 현금으로 3500억달러를 투자할 방법이 없다. 외환보유고 4100억달러가 있다고 하지만 은행 예금처럼 언제든 인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인출할 수 있다고 해도 나라가 가진 외화를 다 털어 넣을 수도 없다. 애초에 3500억달러 투자 약속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물리지도 못한다. 결국 약속을 어기는 것은 우리가 되는 것이고 트럼프의 보복을 각오해야 한다.

먼저 경미(경제는 미국)가 일정 부분 퇴색될 것이다. 특히 25% 관세를 내는 현대기아차는 일본차에 밀려 미국 시장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 피와 땀과 시간을 들여 일군 미국 시장이다. 다른 품목들도 크든 작든 피해를 면하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원하지 않더라도 ‘경미’는 ‘경중(경제는 중국)’으로 무게중심이 조금씩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시장을 닫아 걸고, 공장 지어주러 간 한국 근로자들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전문직 비자 비용을 100배 올리면 심리적으로도 ‘경미’는 멀어진다.

지금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을 다시 보고 있고,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과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트럼프 문제보다 중국의 놀라운 성장 때문이다. 미국이 결국 중국을 막지 못할 것이란 예감도 조금씩 퍼지고 있다. 불행한 일이지만 미국이 자초하고 있고, 발 빠른 기업들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 흐름이 트럼프를 또 어떻게 화나게 할지 모른다.

안미(안보는 미국)도 불확실한 점이 많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대중국 최전선 기지라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함부로 버리지는 않겠지만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 불필요한 미국 무기 강매, 주한 미군 재배치 및 감축, 주한 미군 지위 격하, 한미 연합훈련 축소 및 비용 과다 청구, 있을지도 모를 김정은과의 협상에서 한국 배제 등 다양한 형태로 ‘안미’가 흔들릴 수 있다.

우리가 ‘경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안중(안보는 중국)은 할 수 없다. 중국은 우리를 속국 취급할 나라다. 그렇다면 ‘안미’와 ‘안자(安自·안보는 우리 힘으로)’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하되 미국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나라가 휘청거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재래식 군사력만은 북한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재래식 무기와 장비는 북한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문제는 정치와 군인들이다. 저출산 국가에서 복무 기간을 계속 줄여 10년 뒤엔 육군이 30만명에도 미달된다. 더 기막힌 얘기를 들었다. 아는 분 아들이 박격포병으로 전역했는데 복무 기간 중 실탄 발사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것이다. 그 부대 지휘관은 ‘무사고’가 지상 목표였을 것이다. 안무경무(안보 경제 모두 오리무중)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