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2회에서, 주인공인 한국계 전 미군 장교 유진 초이(이병헌)는 유학을 온 듯한 한국 청년(박정민)을 뉴욕 거리에서 마주친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던 시점인데, 그 청년은 대학 캠퍼스로 가는 길을 묻는다. ‘혹시 곧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들어갈 이승만인가’ 싶었지만 청년은 자신을 안창호라고 소개했다.
1902년 도미한 안창호는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에는 귀국했으니 이 장면은 역사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작진으로서는 논란을 피할 셈이었겠구나.’ 청년 이승만이 ‘구국에 뜻을 둔 개화파 인사’라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는 1984년 KBS ‘독립문’ 이후엔 없었던 것 같다.
80주년 광복절에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되새기자’는 열풍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안중근과 유관순, 윤봉길과 김구를 요즘 사람들 모습처럼 AI로 재생한 동영상을 수백만 명이 조회한다. 한 10년 전부터 광복절마다 ‘독립운동가 선양’ 콘텐츠를 유심히 봐 왔다. 이승만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금기’처럼 돼 버린 이승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권력자일 뿐이었을까. 이시영, 이범석, 신익희, 지청천처럼 대한민국 정부 인사가 된 임정 출신 인사들도 잊히기는 마찬가지 같다. 혹시 어떤 의지가 반영되기라도 한 걸까.
요즘 일각에서 이상한 논리가 보인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독립이 될 줄 알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이 아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1943년 11월 미·영·중 정상이 모인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종래 김구와 임시정부가 중국의 장제스를 움직인 결과라고 봤으나, 최근에는 이승만이 미주에서 벌인 끈질긴 외교 독립운동 노선이 미국의 루스벨트를 설득한 공헌도 그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좌익 주도로 조직된 ‘인민공화국’조차 주석으로 추대할 정도로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거인이었다.
나아가 이승만은 1940년대 말 이미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장악한 공산주의 영역에서 한반도 남쪽을 끝까지 지켜냈다. 스탈린 연구의 권위자인 스티븐 코트킨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는 최근 “이승만이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 남한의 안전을 보장한 ‘빅 픽처’를 실현한 것은 국내의 여러 정치적 실패를 넘어서는 큰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최소한 우리가 이승만이 다져 놓은 자유민주주의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터전에서 오랜 세월 번영을 이루며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올해는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인 대한민국 수립 77주년이자 이승만 탄생 150주년, 서거 60주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