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와 오름, 돌담, 곶자왈, 사시사철 푸른 들과 정겨운 마을들을 지나….” 제주 서귀포시,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간부가 완주증 문구를 읽어주는 걸 듣고 감회에 젖었다. 얼마 전 제주올레 27개 코스 437㎞ 전 구간을 완주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길이 막혔던 4년 3개월 전 시작한 첫 발걸음이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여태껏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걸을 만한 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제주의 속살이라 할 만한 미려한 자연 풍경이 수시로 얼굴을 내민 것도 감동이었지만, 더 큰 깨달음은 조금 다른 데 있었다. 올레길의 정체가 ‘인문학의 길’이었다는 생각이었다.
길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흔적인 데다, 올레길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사람이 살아온 장엄한 자취를 품고 있었다. 2코스의 환해장성에서는 바다로부터 섬을 지키려는 원초적인 염원이 보였고, 9코스의 봉수대에서는 멀리 떨어진 이들과 소통하려는 마음이 읽혔다. 20코스의 광해군 기착비에서는 더 이상 멀리 유배 갈 수 없게 된 폐주의 참회를, 11코스 정난주 마리아의 무덤에서는 종교 때문에 탄압받은 지식인 여성이 최후까지 지키려 했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지점들로 일부러 길을 낸 것 역시 당초 길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였다.
그런데 올레길 위에서 목격하기 쉬운 것은, 그 모든 지점들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질주하듯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빨리 종점에 도착해 완주 도장을 찍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옆을 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리도록 고안된 ‘차안대(遮眼帶)’, 즉 눈가리개를 씌운 경주마가 연상됐다. 4~5시간 걸린다고 안내된 16㎞ 코스를 3시간도 안 돼 주파한 젊은 커플도 봤다. 그들은 걷는 동안 과연 무엇을 봤을까? 한 영화평론가는 “가장 아름다운 추억은 마침내 도달하는 목적지가 아니라 가던 길 자체에 있다”고 했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황급히 가방을 내리고 일제히 출구로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전쟁과도 같은 불안을 느껴야 했던 게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빨리 질주하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한다면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가져야 할 사색과 비판적 사고의 시간을 상실하게 된다.
신청 기간이 7주나 남았는데도 ‘민생 회복 소비 쿠폰’의 나흘 치 신청자가 2800만명을 넘었다. 종이 상품권은 일부 지자체에서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공짜 돈처럼 보이는 재화를 향한 ‘오픈 런’의 분위기에서 “이것이 맞는 정책인가” “국민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 아닌가”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다른 곳으로 돌렸으면 더 소중하게 쓰였을 재원은 아닌가” 같은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사색은 자리 잡을 곳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차안대’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