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적나라한 친(親)트럼프 노선을 내건 후보가 18일 역전패를 당했다. 최근 있었던 캐나다·호주 선거도 일방적 미국 우선주의에 대한 유권자 반감이 표출돼 트럼프에게 대항하겠다고 한 후보들이 당선됐다. 우방에까지 관세를 막무가내로 올리는 트럼프의 최근 행태에 분노하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반발한 2008년 ‘광우병 시위’ 당시 저녁 먹으러 갔다가 인파에 떠밀려 회사에 돌아오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거친 반미 시위였다. 광우병 공포는 결국 비과학적이었다고 판명이 났지만, 격렬한 반미 정서에 놀란 미 정부는 (광우병 감염 우려가 거의 없는) ‘30개월령 미만’ 소고기만 수출하기로 했다. 트럼프는 요즘 이 소고기 수입 제한을 풀라고 공격하고 있다. 한국 무역 협상의 성역(聖域)으로 여겨져온 쌀까지 ‘문을 열라’고 압박 중이다. 한국은 의외로 조용하다. 이쯤 되면 슬슬 고개를 들었어야 할 반미(反美)가 안 보인다.
과거 여러 차례 적나라한 반미 감정을 드러냈던 민주당 이재명 대통령 후보도 ‘미국과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8일 토론회에선 과거 반미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한미 동맹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적 답을 했다. 그는 불과 3년 전 사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미국에서 무기 사들일 필요 없이 자체 기술로 자주 국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책에 썼다. 성남시장 때인 2017년엔 “미군 철수를 각오하고 사드를 철회해야 한다”고도 했다. 틈만 나면 주한 미군 병력을 줄이겠다고 하는 트럼프가 솔깃할 얘기인데, 이 후보는 미국에 유화적 발언을 하면서도 과거 입장을 철회하거나 후회한다고 한 적이 없다.
이 후보는 18일 토론회에서 미·중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외교·안보는) 국익을 중심으로 실용적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미·일·중·러 모두와의 관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고 뭉뚱그려 말했다. 이른바 ‘황희 정승식 외교’로, 미국과 중국이 역사상 가장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는 지금 같은 때엔 현실적인 계획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는 한국이 결국 미·중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곧 닥치리라고 예상한다. 이 후보의 진짜 계획은 무엇일까. 속을 알 수가 없다.
“국익을 지키기 위해선 미국과의 협력뿐만 아니라 중국·일본 등 주변국과의 균형 있는 외교가 필요합니다.” 이 후보의 최근 발언이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대선 캠페인 때 한 말이다. 문 전 대통령은 당선 후 결국 반미 정서가 강력한 집단인, 당내 ‘86세대’의 뜻대로 움직였다. 미국의 어떤 정권도 원치 않는 북핵 관련 대북 제재 완화를 주장해 미 정계에서 반발이 일었고, 미군의 전시작전권 조기 환수를 추진했다. 한미 연합 훈련은 축소·중단됐다. 유세 때 말한 ‘국익’과 ‘균형’은 미국과의 불협화음을 정당화하는 단어로 용도가 바뀌었다. 문 정권의 핵심 인사 중 다수가 지금 이 후보 캠프에서 일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반미 감정 확산에 불만이 컸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 장관은 2004년 한국에 있는 여단 중 하나를 이라크에 보냈다.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트럼프 정부의 당국자들은 이미 주한 미군의 역할을 ‘북한 억제’가 아닌 ‘중국 견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전략을 바꾸고 있다. 중국·대만 충돌 시 주한 미군을 빼서 중국 저지에 쓰겠단 얘기다. 주한 미군의 요격 미사일인 ‘패트리엇’ 중 일부는 예멘과 싸우는 중동으로 벌써 보냈다. 다음 정권이 반미의 기척만 보여도 트럼프는 기꺼이 주한 미군을 줄일 것이다. 이 와중에 북한은 혈맹이 된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전술을 빠르게 습득하고 있다. ‘국익에 따라 실용적으로’를 넘어서는, 이재명 후보의 보다 명확한 입장이 궁금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