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공대, 카이스트와 함께 국내 이공대 트로이카라는 포스텍은 1987년 미국 칼텍(CALTECH·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모델로 태어났다. 한 학년 320명의 소수 정예, 국가 간섭 없는 자유 사학(私學)이 그 모델의 핵심이다. 재학생 수가 서울대 공대·자연대의 2분의 1, 카이스트 3분의 1에 불과한 포스텍은 ‘민간 기업’ 포스코가 출자한 재단 지원을 업고 단기간에 명문으로 발돋움했다. 홍콩과기대처럼 포스텍을 모델로 한 해외 대학이 생길 정도였다.
포스텍 광장에는 과학사의 위대한 과학자 뉴턴, 에디슨, 아인슈타인, 맥스웰의 흉상이 있다. 그 옆으로 흉상 없이 받침대만 있는 빈 좌대가 두 개 있다. ‘미래의 한국 과학자'라고 쓰여 있다. 개교 때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학교 관계자들이 “2020년쯤 포스텍에서 빈 좌대를 채울 첫 주인공이 나올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미래 노벨상 주인공을 위한 빈 좌대는 신생 포스텍의 패기를 상징했다.
하지만 지난 1월 13일 포스텍 재단 이사회에서 ‘국립 전환’ 발언<본지 4월 2일 자>이 불거졌다. 서울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당시 회의엔 이사장인 최정우 포스코 회장, 김무환 포스텍 총장을 포함한 이사 10명이 참석했다. 포스텍 재단이 작성한 이사회 의사록에는 ‘(최정우) 이사장은 포스텍을 국가에 기부 채납하는 방안에 대한 이사들의 의견을 묻다'라고 돼 있다. 포스코 부사장 출신 박성호 부이사장만 “장기적 관점의 재정 문제와 학교 발전의 지속성을 고려할 때 기부 채납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대안”이라며 찬성한 걸로 나온다. 개교 35년 만에 국립 전환 발언이 나온 것이다. 개교 초기의 패기는 어디 간 것일까.
‘국립 같은 사립’ ‘돈 걱정 없는 공대’로 알려졌던 포스텍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개교 첫해인 1987년 29세 청년 교수로 포스텍에 합류해 35년간 성장 궤적을 함께한 김무환 총장을 지난 23일 만났다.
-그날 왜 국립 전환 얘기가 나온 것인가?
“발단은 교수 인건비 문제였다. 포스텍 재단이 매년 우리한테 지원하는 경상비가 600억원 좀 넘는다. 그중 400억원 정도가 교수 인건비로 나간다. 포스텍 교수들은 다른 대학에 비해 강의 부담이 작아 연구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따오는 한 해 2000억원에 이르는 연구비에서 교수 인건비를 줄 수가 없다. 카이스트 같은 국립 과기특성화대만 교수 인건비를 연구비에서 지급할 수 있도록 한 법 규정 때문이다. 교수 인건비 중 200억원만 연구비로 지급해도 포스텍으로선 예산 운용에 숨통이 트인다. 그날 한 이사가 그 점을 지적하며 ‘정부를 설득하자’고 하자 다른 이사 한 분이 ‘차라리 (국가에) 기부 채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사장의 발언은 아니었다.”
-재정 상황이 교수 인건비가 문제될 정도인가?
“포스코 재단 기금은 주식과 채권, 펀드로 구성된 1조4500억원 규모다. 학부·대학원 합쳐 3600명인 대학에는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그러나 현상 유지를 넘어 칼텍이나 MIT와 경쟁하려면 지금의 2배, 즉 3조원은 돼야 한다.” 학생 수 2200명 안팎인 칼텍은 재단 자산이 7조원으로 포스텍의 5배 수준이다. 130년 역사에 교수와 학생을 합쳐 노벨상 수상자 38명을 배출했다. 세계 이공대 평가에서 세계 톱10을 벗어나지 않는다.
김 총장은 “저금리로 인해 기금을 늘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공지능(AI)과 바이오라는 새로운 게임체인저(기존 판도를 완전히 바꾸는 요인)가 떠올랐다”며 “현재 재정만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MIT는 2019년 ‘AI의 깃발 아래 모든 것을 바꾸겠다’며 10억달러(1조1000억원)짜리 AI대학원을 설립했다. 금융회사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이 3억5000만달러를 댔다. 그해 1월 1일 자 조선일보에 이 소식이 나간 뒤 대덕전자 김정식 회장이 서울대에 500억원, 동원그룹 김재철 명예회장이 카이스트에 500억원을 기부했다. 2020년엔 코로나 쇼크가 바이오 경쟁력이 국가 생존력을 좌우한다는 걸 보여줬다. 포스텍도 새로운 미래 청사진을 그려야 할 상황이지만, 재정이 발목을 잡고 있다.
-서남표 총장 시절 카이스트, 어윤대 총장 때 고려대는 총장이 세일즈맨처럼 뛰어 발전 기금을 유치했다. 포스텍 총장 중엔 그런 총장이 없었다. 현실에 너무 안주한 건 아니었나?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서 당장 시급한 뭔가를 고민하며 내실을 다져야 했던 전임 총장들은 당시 현안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미국·일본에 이은 세계 3번째였던 4세대 방사광 가속기(총사업비 4300억원)를 포스텍에 유치한 것도 그분들이었다.”
김무환 총장의 전임자 김도연 울산공업학원 이사장은 포스텍 총장 퇴임 직후인 2019년 8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이공계 대학은 돈 먹는 하마”라며 “이 때문에 세계 명문 공대는 대부분 국립이고 유럽·일본에도 이공계 사립대학은 없다”고 했다. 서울공대학장을 지냈던 그는 “포스텍이 가능했던 건 박태준 회장의 의지로 포스코가 압도적 지원을 해왔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결국 국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세계 최고 이공계 대학인 미국 MIT, 칼텍, 스탠퍼드 대학은 모두 사립이다. 사학은 다양한 건학 이념을 통해 과학 발전과 사회에 기여한다. 소수 정예를 뽑아 인류와 국가에 공헌하는 기술을 개발하자는 포스텍의 산학연 건학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재정 확충을 위한 대안은 뭔가?
“MIT처럼 거액의 기부가 들어온다면 좋겠지만 우선은 우리가 보유한 주식 가치를 높이는 노력을 할 것이다. 지난해 2차 전지 산업이 뜨면서 포스텍이 보유한 포스코케미칼 지분 200만주의 가치가 3000억원이나 뛰었다. 그 가치를 더욱 올리는 일이 우리에게 달렸다. 우리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인재들이 있다. MIT가 AI에서 1조원으로 승부한다면 우리는 5000억원이면 해볼 만하다. 바이오에선 연구 중심 의대에 승부를 걸 계획이다.”
-공대가 의대를 만든다는 것인가?
“한국은 반도체 강국이지만 시장 규모가 압도적으로 더 큰 바이오 시장에선 겨우 1.5%를 차지한다. 화이자와 모더나가 세계 첫 mRNA 백신을 만들 수 있었던 건 mRNA에 지방 나노 입자를 코팅하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오는 공학과 의학이 융합되는 분야가 되고 있다. 포스텍엔 세포막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방사광 가속기가 있다. 열쇠구멍을 보고 열쇠(치료제나 백신)를 디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포스텍의 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한 연구 중심 의대가 세워진다면 바이오 분야도 해볼 만하다.”
-포스텍 개교 당시 미래 노벨상 수상자를 위해 비워둔 흉상 좌대가 화제였다. 하지만 아직도 비어 있는데?
“한국 올림픽 역사를 보면 개인 종목은 금메달이 많았지만 단체 종목은 드물었다. 노벨상은 어떤 분야의 학문 수준이 국가 전체적으로 경지에 올랐을 때 가능하다. 그런 점에선 좌대의 주인공이 나타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김 총장은 “포스텍에 1조원을 기부할 졸업생이 나온다면 비어 있는 노벨상 좌대를 내주겠다는 농담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일즈 총장으로 기억될 준비가 돼 있다”며 “나라 발전을 위해 포스텍의 미래에 투자하겠다는 분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김무환 총장은 국내 대표적인 원전 전문가다. 원자력안전위원회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을 지냈다.
-탄소중립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아직은 원전이 필요한 것 아닌가?
“국민 대부분이 수용할 만큼 안정성을 달성한 원자로 개발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논란을 비롯한 원전 문제는 철저히 과학적 검증과 데이터에 기반해 판단해야한다.”
-현재 원전도 충분히 안전한 것 아닌가?
“우리 사회의 원전 논란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핀란드 같은 북유럽도 원전 발전이 이뤄지고 사용후핵연료 처리장을 어디에 건설할지를 놓고 토론이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일반 국민이 원전의 위험을 과장하는 그린피스 같은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보다는 정부와 과학자들의 분석과 발표를 신뢰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은 원전 정책과 관련해 정부 발표를 신뢰하는 핀란드, 스웨덴 같은 국가들이 전 세계에서 국민의 정직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는 나라들이라는 점이다. 결국 신뢰라는 사회 인프라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