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손녀까지 태어나니 막상 ‘축하한다’ 해놓고 속으로는 아득하더라고요. 딸 결혼만 시키면 해방인 줄 알았는데….”

‘황혼 육아’에 한창인 임모(63)씨는 주말엔 대구 자택에서 쉬다가 월요일 서울에 올라가 딸 집에서 ‘대리 육아 전쟁’을 치른다. 맞벌이하는 딸 부부를 대신해 손녀는 물론 딸·사위 아침 식사까지 차린다. 첫째 손녀(8)를 학교에 보낸 다음 둘째 손녀(6)를 유치원 버스까지 바래다주는 게 임씨 책임. 임씨는 “체력도 달리는데 언제까지 해야 할지 생각하면 갑갑하다”고 말했다.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아이를 조부모 손에 맡기는 일이 늘어나자 임신·육아로 가정 위기가 생긴다는 데 가장 공감하는 연령대가 30~40대가 아닌 60대란 조사가 나왔다.

임신·육아로 가정이 위기를 겪고 있나

본지와 윤영호 서울대의대 교수팀이 지난 3~4월 전국 만 19세 이상 일반 국민 1000명을 상대로 ‘일반 국민의 임신 육아에 대한 조사’를 한 결과, ‘임신·육아로 가정에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는 데 공감하느냐’는 설문에서 60대의 92.8%가 공감한다고 응답(공감한다, 매우 공감한다)했다. 30대(88.8%)·40대(91.4%)보다 높았다. 자녀를 키우는 직장인만 임신·육아가 심각한 위기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조부모 세대까지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육아정책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2018년 보육 실태 조사'(2533가구)에 따르면, 아이 부모를 도와 가정에서 영유아를 돌보는 사람 10명 중 8명(83.6%)이 조부모로 조사된 바 있다. 이번 윤 교수팀 설문에선, 맞벌이 가정이 많은 대도시(특·광역시)에서 임신·육아 위기 공감률(91.4%)이 일반 시(87.1%)·군(90.7%)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에 실버 세대도 황혼 육아에 허리 굽는 상황을 피하려면 임신·육아에 대한 실질적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조사에선 ‘예비 및 신혼부부 주거 지원’이 임신·육아 지원에 “효과 있다”는 응답이 87.4%로 가장 높았고, 이어 ‘배우자 출산 휴가 및 육아 휴직 확대’(83.6%) ‘일과 가정 생활의 양립 가능한 환경 조성’(82.4%) 등이 꼽혔다.

아울러 ‘가족 친화 인증제’ 같은 임신·육아에 도움을 주는 제도는 적극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족 친화 인증제란 육아 휴직이나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출산 전후 휴가 등 자녀 출산과 양육 지원이 우수하고, 유연 근무 제도 등을 운영하는 기업·공공기관을 심사하는 제도다. 선정된 기업과 기관에는 정부·지자체 사업자 선정 시 가점, 중소·중견기업 투·융자 금리 우대, 출입국 우대 카드 발급 등 220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이런 제도를 알고 있다는 비율은 이번 조사에서 33%에 불과했다. 윤영호 교수는 “자녀를 둔 직장인은 물론 황혼 육아에 시달리는 실버 세대까지 임신·육아는 심각한 위기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면서 “출산 문제를 논외로 하더라도 임신·육아라는 고통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성장과 행복에도 중요하리라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