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선 비행기를 타기 전에 ‘키스(Kiss)’를 마셨다.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오스트리아 스파클링 와인. 국내에도 수입되는 ‘키스’를 한 병 샀다.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가 라벨에서 금빛으로 반짝였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프러포즈를 위한 와인”이라는 설명은 낭만적이되 쓸모는 없었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 여행을 앞두고 집에서 혼술용으로 개봉. 한 모금을 머금자 깔끔한 사과 풍미가 입안 가득 번졌다. 가볍지만 강렬하게.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에서 영국 히스로 공항 서점의 책 진열법에 놀란다. 프라하 여행이라면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를 그 도시의 안내자로 삼는 방식. 그렇다면 빈 여행은 누구를 징검다리로 삼으면 적당할까. 클림트를 비롯해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이 떠올랐다. 인문학적으로 풍성하지만 자칫하면 따분해질 수 있다. 아서라, 안전하고 대중적이며 말초적으로 풀자. 빈에서 느긋하게 걷고 보고 생각하고 마신 으라차차 3박 5일.
걷다: 핵심은 도보 여행
인천공항 로밍 대기줄에 서서 검색해 보니 오스트리아는 가톨릭 신자가 85%다. 독일어를 사용한다. 빈을 관통하는 강의 이름은 도나우(다뉴브)다. 한국과 시차는 8시간(서머타임 때는 한국이 7시간 빠르다). 여름 기온은 영상 35도를 넘는 날도 있지만 습도가 낮고 비가 별로 내리지 않는다고. 열두 시간 비행 후 빈 공항에서 고속열차 ‘캣(CAT)’을 타고 17분 만에 도심 미테역에 닿았다.
빈은 걷기 좋은 도시였다. 옛 시가지를 감싸고 도는 게 반지를 닮아 ‘링’이라 불리는 길이 있다. 현지 명칭은 링슈트라세(Ring Strasse). 옛날에 시가지 방어를 위해 동그랗게 성벽을 둘러쌓았는데 그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고. 모차르트의 결혼식·장례식이 열린 슈테판 성당으로 이동해 도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지다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바뀐 슈테판 성당 남쪽 탑에 오르면 우아한 전망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링을 따라 회전하는 트램을 탔다. 빈 필하모닉의 신년 음악회로 유명한 무지크베라인을 비롯해 미술사 박물관, 응용미술박물관(MAK), 합스부르크 왕궁 등에 쉽게 닿는다. 국립오페라극장 옆으로 잘 가꾼 왕궁 정원,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이선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이 탔던 트램에 앉아 17세기 바로크, 18세기 로코코 등 이 오래된 도시의 건축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호강.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다. 처음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왕족을 중심으로 음악을 후원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음악은 중·상류층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모차르트와 하이든, 낭만주의의 베토벤과 슈베르트…. 올해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 탄생 200년. 도심 곳곳에 포스터가 보였다. 클래식 애호가가 아니어도 ‘비포 선라이즈’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같은 영화가 사랑과 음악의 도시로 빈에 매력을 더했다.
도시 면적(415㎢)의 약 절반이 숲이나 공원, 정원이다. 빈 북동부의 거대한 공원 프라터(Prater)가 궁금했다. 호텔에서 전철로 20분 거리. 넓은 공원에서 피크닉을 즐기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한쪽에는 ‘비포 선라이즈’의 키스 장면으로 유명한 대관람차가 돌아갔다. 발아래 풍광이 좋겠지만 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셀린도 없는데 혼자 무슨 청승인가.
보다: 미술사 박물관과 MAK
오페라극장 근처로 잡은 호텔 메일베르거는 깨끗하고 친절했다. 교통도 편리해 가족과 다시 찾고 싶은 도시다. 호텔 조식을 먹고 오전 10시 미술사 박물관 티켓 부스 앞에 섰다. 비가 흩뿌렸지만 줄이 길었다. 온갖 외국어도 들려왔다. 미술사 박물관은 유럽에서도 그런 핫플레이스다. 저명한 작품과 최대 규모의 브뤼헐 컬렉션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중 하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강력한 제국의 힘을 바탕으로 미술 수집품들을 모아놓기 위해 1891년 이 박물관을 지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와 조각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대기줄에서 만난 20대 일본인 커플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정화가였던 루벤스의 작품을 비롯해 걸작이 많다고 해서 일정에 넣었다”고 했다.
1층에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 미술품과 조각, 장식품이 전시돼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에 놓인 ‘켄타우로스를 제압하는 테세우스’ 조각 앞은 포토존이다. 백미는 2층에 설치한 회화 갤러리(7000여 점 소장). 15~18세기 거장들의 작품이 많다.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은 이 그림에서 저 그림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른하게 표류하곤 하는데 이곳은 밀도가 팽팽했다. 브뤼헐의 ‘농가의 결혼식’ ‘바벨탑’과 함께 루벤스의 ‘성모 마리아의 승천’, 벨라스케스의 ‘왕녀 마르가리타의 초상화’, 렘브란트가 작업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거대한 자화상’ 앞에 오래 머물렀다.
배가 고팠다. 1618년에 문을 열었다는 슈바르첸 카밀로 향했다. 클래식한 오픈 샌드위치, 세련된 빈 요리로 유명한 식당. 돼지고기로 만든 슈니첼과 식초 드레싱이 들어간 감자 샐러드(카르토펠살라트)에 와인을 곁들였다. 빈 관광청 직원 마티아스 슈빈들은 “빈 요리는 유럽 여러 나라의 문화적 다양성을 흡수해 굉장히 활기차다”며 “엄격하고 재미가 덜한 독일인과 달리 오스트리아 사람은 자유분방하다”고 했다.
링슈트라세에 있는 응용미술박물관(MAK)에도 들렀다. 19세기의 웅장한 건물에 자리한 이 박물관은 가구부터 직물, 유리, 그래픽 디자인까지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건축과 현대미술에도 영감을 줄 만한 ‘융합’이 돋보인다. 일본의 기모노와 만화를 전시 중이었고 관람객은 청소년이 많았다. 레이날드 프란츠 MAK 관장은 “최근에 딸이 런던으로 K팝 콘서트를 보러 다녀올 정도로 한국도 문화 강국”이라며 “한복 등 K컬처와 관련된 전시도 열고 싶다”고 말했다.
오페라극장은 출국 전부터 사실상 매진 상태라 표를 구할 수 없었다. 스탠딩석은 두세 시간 전 현장에 가서 기다려야 해 ‘가심비’가 좋지 않았다. 7~8월에는 문을 닫는다. 그때 빈을 방문한다면 저녁에 시청사 앞으로 이동하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무료로 오페라를 상영한다. 간이식당도 들어차 세계 각국의 술과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눈과 귀로 오페라를 간접 체험하고 입으론 유럽 여러 나라를 음미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마시다: 와인을 생산하는 수도
시대를 초월한 유리 공예품 ‘롭마이어’의 소유주인 레오니드 라스를 만났다. 1823년 설립해 빈의 장인 정신과 세련된 디자인의 상징이다. 섬세한 수공예 크리스털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전통과 현대의 우아함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와인 글라스는 “공기처럼 가볍고 입으로 불어 마실 수 있으며 완벽한 밸런스”라는 평을 받는다. 라스는 “유리잔은 형태에 따라 성격을 표현한다”며 “손잡이와 장식, 잔을 부딪쳤을 때 소리도 중요하다”고 했다.
이튿날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팔레 코부르 와인 보관소를 방문했다. 16세기부터 있던 유서 깊은 ‘냉장고’다. 성벽이 있던 자리에 세운 호텔. 그 건물 지하에 매우 값진 와인 저장고가 있다. 내부 기온은 섭씨 7도로 유지된다. 디지털 열쇠와 지문 인식이 맞아야 들어갈 수 있다. 27리터(L)짜리 거대한 병도 보였다. ‘로마네 콩티 2004’는 23만유로(약 3억 6000만원)라고 했다. 와인 한 병이 명품 자동차나 집값과 비슷하다.
빈 관광청은 “빈은 도시 안에 광활한 포도밭을 가지고 와인을 생산하는 유일한 수도”라며 “와인은 이 도시 정체성의 중요한 일부”라고 설명한다. 북서쪽 19구역에 660만㎡ 면적의 포도밭이 있다. 빈의 대표 와인은 ‘게미슈터 자츠(Gemischter Satz)’. 다양한 포도 품종을 같이 밭에 심어 한 번에 수확하고 함께 양조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적게는 세 종류부터 많게는 스무 종류까지 포도를 섞어서 만든다. 그 밖에도 다양한 와인을 생산한다. 포도밭 앞에는 직접 생산한 와인을 파는 술집과 호텔, 그리고 ‘호이리게(Heuriger)’가 늘어서 있다. 호이리게는 본래 ‘햇포도주’ ‘햇것’이라는 의미. 오스트리아에서는 갓 수확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사람들이 주머니에 음식을 챙겨 가 술을 마시던 식당을 일컫는 단어다.
빈에서 재배한 포도로 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와인을 마시러 외곽으로 나갔다. 빈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40~50분 정도만 이동하면 푸른 포도밭 언덕을 가진 와이너리에 닿는다. 호이리게 정문에 솔가지가 걸려 있으면 ‘영업 중’이라는 뜻. 음식도 팔지만 직접 카운터에서 계산한 뒤 가져오는 셀프 시스템을 고수하는 곳이 많다. 소시지·빵·샐러드·닭튀김 등에 와인을 곁들여 마시고 국빈 방문 일정에 넣을 정도로 빈다운 장소다.
1697년에 설립된 스테판 푹스-슈타인클라머 와이너리는 전통과 현대 기술을 결합하여 프리미엄 와인을 만든다. 황토가 풍부한 빈의 북쪽 도나우강과 점토와 석회암이 많은 남쪽에서 포도밭을 경작해 개성 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포도 재배를 전공한 스테판은 “포도나무는 뿌리가 8m까지 내려가고 9월부터 수확하는데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9품종을 섞는다”며 “겨울에 눈이 잘 안 오고 점점 드라이해지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근년의 작황은 2021년이 최고였고 2018년이 가장 안 좋았다고 한다.
이 여행은 빈을 대표하는 호이리게 중 하나인 마이어 암 파르플라츠에서 점심식사와 함께 마무리됐다. 한때 베토벤이 살던 역사적인 건물에 자리한 그곳은 아늑하고 소박한 분위기에서 직접 생산한 와인과 전통 빈 요리를 제공했다. 셀린은 없었지만 빈의 와인 문화를 경험하기엔 완벽에 가까운 장소였다.
<여행 수첩>
대한항공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직항편을 운항한다. 경유편도 다양하다. 빈 시내를 구석구석 훑고 싶다면 교통 패스(시티카드)를 구입할 것. 트램과 전철, 버스를 무제한으로 마음껏 타고 이동할 수 있다. 빈 공항에 있는 여행 정보 센터나 웹사이트(viennacitycard.at)에서 체류 일정에 맞게 사면 된다. 빈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할 때는 공항철도 ‘캣(CAT)’이 편리하다. 한국에서 예매해 스마트폰에 담아 가거나 현지에서 구매할 수 있다. 대부분 신용카드를 받기에 유로를 많이 환전해 갈 필요는 없다. 식당에서 팁은 5~10% 주는 게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