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헤다 가블러’의 주인공 헤다는 종잡을 수 없다. 당돌하고 유쾌하지만 세상과 자신에 대해 치명적으로 무지하다. 보수적이지만 스스로 보헤미안이라고 믿는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어떤 관계도 지속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모순투성이. 그런데 그 배역을 이영애가 연기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당당한 헤다(이영애)는 학자 조지 테스만(김정호)과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일상이 답답하고 지루할 때 과거의 연인 에일레트(이승주)가 작가로 성공해 나타난다. 별 볼일 없다고 여긴 친구 테아(백지)가 그의 성공을 도왔다는 사실에 그녀는 더 혼란스럽다. 한편 판사 브라크(지현준)는 은밀하게 헤다를 통제하려 든다.
드라마 ‘대장금’,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배우 이영애를 연극으로 만났다. ‘헤다 가블러’(6월 8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는 32년 만의 무대 복귀작. ‘인형의 집’으로 기억되는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썼지만 국내에선 공연이 뜸한 작품이다. 제목을 ‘헤다 테스만’이 아닌 ‘헤다 가블라’로 지은 건 결혼이라는 틀에 그녀를 가두지 말라는 뜻이리라.
일요일 오후 객석엔 중년이 많아 보였다. 이영애를 라이브로 만날 드문 기회. 기부 천사로도 유명하다.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서울 핼러윈 참사 유족에게…. 이승만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기부를 해 정치적 논란이 일었을 땐 “다른 대통령들의 재단 및 기념관에도 후원했다”며 “과오는 과오대로 역사에 남기되 공을 살펴보며 화합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헤다는 이 연극이 1891년 초연됐을 때 ‘악녀’ ‘이해 불가능’ 소리를 들었다. 2025년에 1000석 넘는 한국 대극장에서 흥행하리라곤 작가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친절한 금자씨’)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봄날은 간다’)에 이어 이번 연극에서 귀에 꽂힌 이영애의 대사는 “지루했어요, 너무 너무 너무”와 “지루해 미치겠다”였다. 단순히 가부장제에 항거한 과거의 여성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겪는 피로감과 포개질 만큼 헤다는 현대적이다. 어느 때보다 쉽게 연결되지만 ‘진짜 연결돼 있다’는 감각은 드물고 귀해졌으니까.
연극 속 헤다에 점점 스며든다. 욕망, 좌절, 사랑, 상실, 불안….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흥미롭고 고독하며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1891년의 헤다는 권총 방아쇠를 당긴다. 그 권태가 2025년 서울까지 날아와 가슴팍에 박힌다. 객석에 앉은 이상 그 총탄을 막을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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