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루치(멸치) 하면 기장이지예. 배를 딱 갈라 보면 알재. 바다 밑이 바위라 진흙 같은 뻘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다카이. 구워 먹으면 고소하고, 회로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재.”
지난 18일 부산광역시 기장군 대변항(大邊港) 멸치 거리. 30년간 ‘대승수산’에서 멸치를 손질해 팔아온 이혜란(63)씨의 멸치 자랑에 손님들이 발길을 멈췄다. 횟거리 주문을 받은 이씨가 멸치 내장을 긁어낸 뒤 가시를 발라내며 한 마리를 손질하는 데 채 2초가 걸리지 않았다. 울산 남구 삼산동에서 온 김현주(44)씨는 “해마다 친정 엄마에게 보낼 멸치 젓갈 한 통과 무침용 횟거리를 사러 온다”며 “막걸리로 멸치를 헹군 뒤 초장 양념에 상추, 양파 등을 넣고 무쳐 먹으면 입맛이 살아난다”고 말했다.
부산 기장 멸치가 제철을 맞았다. 기장 멸치는 몸길이 10~15㎝ 안팎의 크고 굵은 대멸(大蔑)이다. 전국 어획량 60~70%를 차지한다. 해마다 제철인 4~5월 대변항에서 기장 멸치 축제가 열렸지만,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2년째 취소되면서 관광객 발길이 줄었다. 하지만 상인들은 “코로나 전에 비해 매출이 20% 정도 줄어든 것 같다. 이 정도면 선전했다”고 자평했다.
◇제철 맞은 기장 멸치
이날 오후 대변항 선착장. 줄지어 선 어선 10여 척에서 노란 비옷을 입은 선원들이 은빛 멸치를 그물에서 털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헤이야 슉! 에이야 슉!” 29t급 대승호 앞에선 선원 10명이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그물을 높이 들었다 내리며 멸치를 털어냈다.
기장 멸치는 바닷속에 그물을 커튼처럼 길게 내리는 유자망 방식으로 잡는다. 2㎞ 길이 그물에 걸린 멸치를 모두 털어내려면 3시간 정도 걸린다. 장기영(47) 기장수협 경매사는 “어민들 사이에서도 멸치 털이는 고된 작업으로 손꼽힌다”며 “요즘엔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출신 선원이 절반쯤 된다”고 말했다.
선원들이 털어낸 멸치는 25㎏짜리 상자에 담겨 기장수협 위판장으로 옮겨져 중매인들에게 경매로 팔린다. 기장수협에서 직접 판매하지는 않고, 전화 주문이 들어오면 중매인들을 연결해 준다. 중매인들은 낙찰받은 멸치를 상태에 따라 횟감, 구이용으로 가려 팔고, 나머지는 국산 천일염에 절여 젓갈로 판다. 기장수협은 “올해는 멸치 어황이 괜찮아서 소비자 가격이 횟감은 1㎏에 2만원 선, 젓갈은 28㎏들이 한 통당 6만원 선”이라며 “택배로 전국 어디라도 보내준다”고 밝혔다.
기장수협에 따르면 지난달 초부터 이날까지 위판장에서 거래된 생멸치는 25㎏ 상자 6만4000여개로, 1622t에 달했다. 박종수 대변어촌계장은 “최근 일주일 동안 멸치가 특히 많이 잡혀 어선 1척당 하루 허가량인 200상자(20t급 이상 어선 기준)를 다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단단한 살, 고소한 맛
대멸은 기장 앞바다에 번식하러 찾아왔다가 조류가 순해지는 조금 물때에 암초 위에 알을 쏟아낸 뒤 생을 마친다. 수심이 깊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물살 센 곳에서 자라 살이 단단하고 맛이 더 고소하다. 국립수산과학원 김중진 박사는 “산란을 앞둔 4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기장 앞바다에 멸치군이 많이 형성된다”며 “이 때가 맛도 가장 좋다”고 밝혔다.
대변항엔 수산특산물 업체 30여곳이 몰려 있다. 어선이 잡아온 멸치를 경매로 낙찰받아 판매하는 중매업체와 이를 소매로 받아 판매하는 소매업체, 가공업체들이다. 제철 맞은 멸치를 요리해 파는 주변 식당들도 이때가 대목이다. 기장 멸치는 조림, 볶음용인 소멸이나 중멸과 달리 회 무침이나 구이, 찌개 등으로 조리해 판매한다. 기장의 특산품인 미역, 다시마 등을 파는 건어물 가게들도 덩달아 바빠진다. 만해 건어물백화점 이태웅(39)대표는 “4~5월에 많을 땐 택배 주문이 하루 100건씩 들어온다”고 말했다.
◇다음 달 수산물 직매장 준공
국립수산과학원은 지난해 4월부터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장 멸치를 포함해 국내 멸치 자원 조사를 시작했다. 남해안 완도부터 부산에 이르는 연안 해역에 분포하는 멸치 알과, 어린 멸치 등을 대상으로 서식 환경 등에 대한 정밀 조사를 진행 중이다.
기장군은 군어(郡魚)인 멸치, 특산품인 미역과 다시마 등을 취급하는 ‘대변 수산물 직매장’을 오는 6월 대변항에 준공할 계획이다. 300평 규모 직매장 건물에는 멸치 외에도 기장군 18개 해역에서 생산하는 미역과 다시마, 아귀, 붕장어, 가자미, 전복, 문어 등 수산물을 판매하는 점포가 들어선다. 오규석 기장군수는 “최근 기장은 대변항뿐 아니라 오시리아관광단지, 부산 치유의 숲, 부산 도심과 연결되는 갈맷길 등 관광 자원이 늘고 있다”며 “기장 명물인 멸치와 다시마, 미역 같은 특산품을 관광 자원과 연계해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