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탈북 여성 박연미(29)씨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박연미의 북한의 목소리(Voice of North Korea by Yeonmi Park) 구독자 수는 111만명이다. 구독자 수 100만명이 넘는 채널 운영자에게 수여되는 골드 버튼까지 받았다.
그는 업로드한 동영상에서 능숙한 영어로 북한 김정은 일가의 폭정과 북한 사회의 폐쇄적이고 모순적인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북한 인권운동가이자 유튜버로 활동해온 그가 미 진보 진영을 저격하는 보수 진영의 스타로 떠올랐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2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NYT는 ‘미국의 우파가 된 탈북자’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박씨의 최근 활동을 조명했다. 박씨는 현재 보수 기독교계 시민단체 ‘터닝포인트 USA’에서 월 6600달러(약 860만원)를 받고 연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이 단체 주최 행사에서 박씨는 “많은 미국인들은 압제와 폭정은 자신들과 관련이 없고 북한 같은 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평함과 사회주의 천국 등의 구호를 앞세운 세력들이 결국은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하나 빼앗게 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 사회도 공산 독재의 손아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 것이다.
지난달에는 보수 성향 방송인 폭스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컬럼비아대에서의 수업 경험을 이야기하며 “북한 체제에서 인민들을 세뇌시키는 방식과 교육 방법이 똑같았다. 미국 교육 기관들의 좌파 이념 이식이 우리나라(미국)에 가장 큰 위협”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월 출간한 책 ‘시간이 남아있는 동안(While Time Remains)’에서도 진보 진영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대학 교육의 획일성을 집중 비판했다. (영국 제국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제인 오스틴의 소설과 서양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미국 학생들로부터 비난받았던 경험을 회고하며 “컬럼비아대에서 함께 배운 학생들은 덩치만 커다란 아이들 같았다”고 비판했다. 컬럼비아대에선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를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것 같았다고도 썼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에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대해 “절대적인 거짓말쟁이” “정치적 올바름이 여성성을 지워버렸다”며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박씨는 13세였던 2007년 아버지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자 어머니와 함께 북한을 탈출해 몽골을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성적 봉변을 당하는 등 탈북 과정에서 겪었던 인권 탄압 경험을 생생하게 증언하면서 북한 인권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를 거쳐 2015년 미 컬럼비아대로 유학한 뒤 현지에 정착해 재작년 시민권자가 됐다. 그의 탈북 수기인 ‘살기 위해(In Order To Live)’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2014년 영국 BBC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됐다.
그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할 당시 미국의소리(VOA) 인터뷰에서 “코로나로 대규모 강연이 어려워져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북한의 현실과 다양한 모습을 알리고 싶어 유튜브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미국 보수 진영의 연사로 변신한 계기 중에는 개인적 경험도 있다. 그는 책에 2020년 컬럼비아대를 졸업하고 아들과 시카고 거리를 걷고 있다가 흑인 여성에게 지갑을 빼앗겼던 경험을 썼다. 범행 증거를 남겨놓기 위해 이 상황을 휴대전화로 촬영하자 다른 여성이 자신을 향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박씨는 “그때 경험이 정치적 관점을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며 “갈 데까지 간 미국의 ‘워우크 병(woke disease)’이 보통 사람들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woke’는 ‘깨어 있는’이라는 뜻으로 원래 ‘인종·성별 등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깨어 있다’는 의미로 널리 쓰였으나, 최근에는 보수 진영에서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C) 지지자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박씨의 변신을 보는 미 진보 진영의 시선은 곱지 않다. NYT는 “박씨는 성인이 된 후 대부분의 시간을 언론의 조명 속에 산 사람”이라며 “미 정치판에서 돈벌이가 되는 틈새시장을 찾았다”고 했다. 이어 “출판계와 학계에선 박씨가 그간 밝혀온 탈북 경험이나 미국에서의 경험이 앞뒤가 맞지 않거나 과장된 면이 있다고 지적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박씨는 NYT 인터뷰에서 “내 정치 이념은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단호하고 거칠지 않다”며 “나는 동성 결혼을 지지하고 자유를 중시하며, 스스로를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의 변신이 마지막이 아닐 수 있다. 5년 뒤엔 전혀 다른 내용의 책을 쓸 수도 있다. 미국은 자유 사회 아닌가”라고도 말했다. 박씨는 북한 인권운동가에서 우파 진영의 연사가 된 뒤 강연 요청이 급감하고 책도 전작보다 판매가 부진해 수입이 한창때보다 3분의 1로 떨어졌다고도 했다.
박씨는 본업인 북한 체제 비판 활동도 계속하고 있다. 지난 20일엔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 북한 당국이 성경책을 소지하고 있었던 북한 주민과 그들의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게까지 종신형을 선고했다는 북한 내부 소식을 전하며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2021년 미 자유아시아방송 인터뷰에서 “미국이나 국제사회에서는 북핵에 가려져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덜하다”며 “이 사안을 홀로코스트처럼 누구나 잘 아는 문제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