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정밀한 조사 끝에 나온 결과가 교과서에도 실린 ‘상식’을 뒤집는 경우가 있다. 이상태(78)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은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으로 있던 1995년 전국 공공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古)지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이태경 기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던 겁니다. 나라에서 김정호를 첩자로 의심해 잡아들인 뒤 불태워 버렸다고 전해지던 그 목판이 멀쩡하게 남아있었던 거죠.”

‘한국 고지도 발달사’ ‘사료가 증명하는 독도는 한국 땅’ 등의 연구서를 내며 고지도와 영토 문제 전문가로 활동해 온 이 회장이 최근 새 연구서 ‘김정호 연구’(경인문화사)를 냈다. 그는 여기서 일반인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지던 김정호의 세 가지 통설을 따져봤다. 첫째는 당시 지도의 정확성이 뒤떨어졌기 때문에 직접 지도 제작에 나섰다, 둘째는 지도 제작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백두산을 일곱 번 올라갔다, 셋째는 ‘대동여지도’를 나라에 바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첩자로 의심해 옥사했으며 목판은 소실됐다였다. 그가 말했다.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조선 후기 나온 정상기의 ‘동국대지도’와 ‘팔도분도’ 같은 지도들은 대단히 뛰어난 수준에 이르렀고, 김정호의 지도 제작 역시 그 성과 위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했다는 얘기도 “이규경, 최한기, 신헌 같은 동시대 사람들 기록에서 김정호는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참고해 지도를 만들었다고 했지, 전국을 답사했다는 말은 전혀 없다”고 했다. 고지도는 실측을 바탕으로 한 지도도 아닐뿐더러, 백두산에 올라가 봐야 지도 제작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호가 옥에 갇혔다는 얘기 역시 ‘고종실록’ ‘추안급국안’ 등 어느 기록에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전국 답사설과 옥사설은 1925년 국내 한 신문에 실린 ‘고산자를 생각함’이란 기사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육당 최남선으로 보이는데, 1934년 총독부가 낸 ‘조선어독본’에 살이 붙은 이야기가 등장하고 광복 후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비슷하게 실립니다. 그 뒤 드라마나 영화에까지 이 얘기가 반영된 것이죠.”

하지만 이 회장은 “이런 것들을 걷어내더라도 ‘대동여지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고지도는 자세한 지리 정보를 담은 지리서를 바탕으로 제작하는 것인데, 김정호는 ‘동여편고’에서 ‘대동지지’에 이르는 5종의 방대한 지리서를 편찬했고, 네 차례 ‘청구도’와 두 차례 ‘동여도’ 제작을 거쳐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뛰어난 지도 제작 기술을 집대성한 위에 서양 과학을 가미한 불후의 명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장은 이번 연구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대동여지도’ 목판 소장 경위를 밝혀냈다. 1924년 최한웅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판매한 것인데, 최한웅은 최남선의 아들로 이때 나이 7세였다. 김정호의 사망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은 천주교인으로서 1866년 병인박해 때 희생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