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올라갈 자리는 없지만 제가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춤이 너무 많아요. 에투알(étoile·별)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에투알 중에서도 큰 에투알이 되고 싶어요.”

지난달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단(POB)에서 에투알(수석 무용수)로 지명된 발레리나 박세은(32)은 “이제 내 춤에 더 집중하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19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귀국 기자회견에서 박세은은 “에투알이 된 뒤 개인 탈의실과 전담 어시스턴트가 생겼지만, 오는 9월 ‘데필레(défilé·행진)’에 왕관을 쓰고 행진할 때 비로소 실감이 날 것 같다”며 “이 흥분을 좀 더 즐기고 싶다”고 했다. POB 단원과 발레학교 학생 등 200~300명이 참여하는 데필레는 3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시즌 개막 행사다.

파리오페라발레단 발레리나 박세은은 19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에투알이 되고 축하 문자에 일일이 답하는 데 6일 걸렸다.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더라”고 했다. /에투알클래식

1669년 창단한 POB는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긴 발레단. 외국인이 5%에 불과할 만큼 자존심 강한 POB에서 동양인 에투알은 박세은이 처음이다. 지난달 ‘로미오와 줄리엣’ 개막 공연을 마친 후 에투알 승급을 통보받은 박세은은 “공연 직전 예술감독이 꽃을 보내줘 예감은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내 춤을 췄다”며 “파업과 코로나 사태 등으로 오래 기다린 끝에 따낸 별이라 눈물이 터졌다”고 했다.

“한국에서 러시아 발레를 배운 제가 10년 전 POB에 입단했을 때 양면적인 평가를 받았어요. 하나는 ‘박세은은 기술이 뛰어나다’였고 다른 하나는 ‘그 춤은 프랑스 발레가 아니다’였습니다. 저는 바닥부터 프랑스 발레를 새로 익혀야 했어요. 방황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성장하며 마침내 에투알이 됐기에 더 자랑스러워요.”

박세은은 10대 시절 세계 4대 발레 콩쿠르(바르나·잭슨·모스크바·로잔) 중 세 봉우리를 정복한 콩쿠르의 여왕이었다. POB는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등과 함께 세계 최정상 발레단으로 꼽힌다. 박세은은 2018년 무용계 아카데미상으로 통하는 ‘브누아 드 라 당스’를 받기도 했다.

박세은이 에투알로 처음 참여하게 되는 '데필레' 무대. 그녀는 (베네수엘라 출신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이 파리오페라발레 음악감독으로 와 지휘해서 더 특별할 것 같다고 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POB는 굉장한 계급사회예요. 승급 시험으로 1년에 한 번 2분짜리 솔로 두 개를 추는데, 저는 그렇게 무용수를 평가하는 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표현력과 해석력을 보여주고 싶다면 그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젠 제 춤을 의심하지 않아요. 결국 춤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장 중요해요.”

코로나 이후 랜선 공연을 많이 했지만 호흡까지 다 전달되진 않는다. 박세은은 “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라 사실 카메라 앞에서 춤추고 싶진 않았다”며 “발레는 관객과 한 공간에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후배들을 향해서는 “예술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며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생각으로 힘겨워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에투알이 되면서 여름 휴가철에 국내 무대에 서는 게 수월해졌다. 박세은은 “갈라 공연을 논의해볼 것”이라고 했다. POB 은퇴 연령은 42세. 딱 10년 남았다. 그녀는 욕심나는 작품으로 ‘돈키호테’와 ‘라 바야데르’ ‘마농’을 꼽았다.

박세은은 승급 시험에서 탈락했을 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쉬지도 않고 공연했다. 그래야 트라우마가 안 남을 것 같았다. 불안해서 흔들린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2014년 '백조의 호수' 주역을 맡았을 때다. "예술감독이 저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올리는 '라 바야데르' 주역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백조의 호수' 주역을 맡은 에투알이 다쳐 갑자기 호출을 받았어요. 나흘 안에 익혀야 했지요. 러시아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습복으로 갈아입었죠. 게다가 파트너가 손만 잡아도 민폐일 것 같은 에투알, 마치아스 에이만(2012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