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은 경주 토함산 동쪽으로 펼쳐진 마을이 경주시 양북면(陽北面)이다. 4000여 주민이 논농사 지으며 소 키우고 딸기·토마토·산딸기·부추를 재배하며 산다. 이 마을 이름이 오늘(4월 1일)부터 ‘문무대왕면’으로 바뀐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른 행정통폐합으로 갖게 된 이름을 107년 만에 뒤로하고 삼국 통일을 달성한 신라 왕의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경주시 문무대왕면 행정복지센터 직원들이 앞뜰에 새로 놓인 안내석에 모였다. /경주시

5년 가까이 진행되던 ‘마을 개명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주민들은 다음 달 예정된 ‘문무대왕면 선포식’ 준비에 들어갔다. ‘문무대왕면’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바닷속 수중릉으로 유명한 문무대왕릉과 그의 넋을 기린 사찰 감은사터가 양북면에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옛 하동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옛 도암면),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옛 서면)과 포항시 호미곶면(옛 대보면)….

새로 바뀐 마을 이름인 '문무대왕면'을 알리기 위해 세운 간판. /문무대왕면 행정복지센터 제공

2000년대 이후 주민들이 앞장서 역사적 유래나 명승, 특산품이 부각되도록 바꾼 마을 이름이다. 이런 트렌드에 주민들이 주목하면서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 이름을 바꿔보자는 논의가 시작됐다. 마을 개명 추진에는 현실적 고민이 있었다. 양북면 역시 여느 농촌 마을처럼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활력을 잃고 있었다.

한때 초등학교 4곳에 분교 2곳까지 뒀지만 지금은 초등학교가 한 곳만 남아있다. 관광객들과 귀농인들의 마음을 붙들고, 특산품 판로 개척을 위해선 뭔가 확 눈에 들어오는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주민들이 많았다. 이장들과 각종 단체장, 일반 주민까지 32명이 명칭 변경 추진 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장을 맡은 이판보(67) 용동2리장은 “토함산을 딴 토함산면, 마을에 있는 유서 깊은 절 기림사에서 유래한 기림사면 등도 후보로 거론됐지만, 압도적으로 문무대왕면으로 의견이 모였다”고 했다.

경주시가 개최한 문무대왕면 명칭 자문회의. /문무대왕면 명칭변경 자문위원회

특히 재위 중 고구려 멸망(668년)과 당나라 세력 축출(676)을 완수한 그가 죽으면서 “나를 바다에 장사 지내달라. 죽어서 용이 돼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는 마을을 알리는 ‘스토리텔링’ 소재로도 매력적이었다. 가구 단위로 진행된 마을 명칭 변경 조사에서 88.3%(1137가구)가 이름을 바꾸는데 찬성했고, 그중 77%가 문무대왕면을 선택했다. 경주시도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필요한 각종 행정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경주시와 향토사학계에서는 마을 이름 변경으로 다른 왕들보다 덜 알려진 문무왕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조철제(70) 경주문화원장은 “신라의 삼국 통일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부각되다 보니 문무왕은 통일이 이룩한 당사자임에도 활약상이 선덕여왕이나 태종무열왕 등 선왕들보다 덜 알려진 측면이 있었는데, 이런 아쉬움을 해소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음 달 4일 예정된 ‘문무대왕면 선포식’에서는 경주시와 면 관계자,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 제막식을 연다. 이날 오후 주민들은 왕이 잠든 수중릉이 보이는 봉길리 앞바다에서 제를 지내고 문무대왕면 출범을 고할 예정이다.

경주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사적 158호 문무대왕릉. 왕의 유언에 따라 수중에 장사 지내고 고인은 호국 용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주민들은 마을 특산품도 순차적으로 ‘문무대왕 한우’ ‘문무대왕쌀’ ‘문무대왕토마토’ ‘문무대왕산딸기’ ‘문무대왕부추’라는 이름으로 출하할 계획이다. 주민들은 “문무대왕 덕분에 어려운 시기에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이말선(65) 문무대왕면 새마을부녀회장은 “하늘의 용이 되신 왕께서 우리 마을뿐 아니라 나라도 잘 돌봐주셔서 코로나가 빨리 퇴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