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가슴이 터질 듯한/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매일 밤 전국 노래방에서 누군가는 부르고 있을 이 노래, 최호섭이 1988년 발표한 ‘세월이 가면’이다. 전 세대가 흥얼거리는 발라드의 고전이 됐지만 원곡자는 세상에서 잊히며 얼굴 없는 가수가 됐다. 그 최호섭이 돌아왔다. 신곡 셋에 리메이크한 ‘세월이 가면’까지 네 곡이 실린 디지털 미니 앨범을 들고서. 1994년 3집 이후 27년 만에 발표하는 새 앨범이다.

27년만에 신곡을 발표하는 최호섭. /벅키뮤직

동글동글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탁성을 내지르던 ‘발라드 아이돌’의 모습이 희미하게 남은 57세의 최호섭은 “노래 제목대로 세월이 정말 많이 흘러갔다”고 껄껄 웃었다. “이번 앨범의 모토는 브러더십(brothership·남자들의 뜨거운 의리)이에요. 노래 고르고 연습할 때마다 ‘헤이~ 브러더!’ 하고 하이파이브 하면서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신보 작업 중인 최호섭이 함께 참여한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벅키뮤직


작곡가 겸 프로듀서 박강영, 밴드 ‘위대한 탄생’ 멤버 이태윤(베이스)과 최태완(키보드), ‘H2O’ 출신 기타리스트 타미 김, 포크 록 밴드 ‘파이팅 대디’ 리더 심재웅…. 컴백 앨범에 참여한 ‘브러더’들은 최호섭과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온 중견 연주인들이다.

최호섭은 솔로 데뷔 전 김현식의 밴드 ‘돌개바람’에서 활동했고, 박강영·이태윤·최태완은 ‘다섯 손가락’을 결성해 인기몰이를 했다. 이들은 고교 시절부터 밴드를 꾸려 여학생 팬들을 몰고 다녔다. 1980년대 아이돌들이 컴백 앨범에 의기 투합한 셈이다.

원래 음악인 집안이다. 아버지는 한국 뮤지컬의 선구자인 작곡가 고(故) 최창권. 형(대학가요제 수상곡 ‘연극이 끝난 후’를 쓴 최명섭)과 동생(원준희의 ‘사랑은 유리 같은 것’ 등을 쓴 최귀섭)이 음악 활동을 하는 것과 달리 오랫동안 은둔한 것은 ‘세월이 가면’의 벼락 인기가 불러온 상처 때문이기도 했다고 그는 털어놨다.

최호섭이 새 앨범에 수록될 노래를 녹음하고 있다. /벅키뮤직 제공


“밴드 음악을 하던 저에게 맞는 스타일의 노래는 아니었어요. 요즘 흐름에 맞는 팝발라드가 한 곡은 있어야 한다고 해서 마무리 작업까지 다 끝난 상황에서 막판에 집어넣은 노래가 히트한 거죠. 그런데 매일 무대에 올라 똑같은 노래만 라이브로 부르다 보니 정신 분열이 올 지경이었어요. 결국 성대 결절이 왔고, 이후 앨범은 잘 안되거나 엎어지고…. ‘세월이 가면’은 무대를 잊게 한 곡이네요.”

27년 만에 신곡을 발표하는 최호섭은 “‘세월이 가면’은 나에게 영광만큼 큰 좌절도 안겨줬지만, 가족의 사랑이 깃든 운명 같은 노래”라며 “코로나로 인해 삭막해진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노래들을 많이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벅키뮤직

부친이 몸담았던 뮤지컬계에서 스태프와 배우로도 잠깐 활동한 그는 2000년대 이후 거처를 강릉으로 옮기고 유기 동물 보호 활동에 주력해왔다. 펜션과 라이브 카페도 운영했지만 음반이나 방송 활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 최호섭에게 절친 박강영이 찾아가 “너 너무 쉬었다. 앨범 내자”며 손을 내밀자 최호섭은 되레 “아니 그 얘기를 왜 이제서야 하냐”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무대가 그리웠던 그를 이끌어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1988년 발매된 최호섭 1집 표지.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이 해는 '세월이 가면'을 비롯해 '집시여인'(이치현과 벗님들), '나항상 그대를'(이선희), '분홍립스틱'(강애리자), '그대에게'(무한궤도), '담다디'(이상은) 등 명곡들이 쏟아져나왔다. /멜론 홈페이지

이별의 심정을 담은 발라드 ‘굿바이’를 25일 선공개하고, 뒤이어 어쿠스틱 사운드를 입혀 담백하게 리메이크한 2021년판 ‘세월이 가면’도 선보인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숙명 같은 노래잖아요. 형(작사)과 동생(작곡)이 합작했고, 아버지가 직접 미디(컴퓨터 음악)로 전주까지 만들어주셨으니 가족 사랑이 깃든 작품이기도 하고요. 어머니도 생전에 제가 다시 활기차게 무대에 서는 걸 보고 싶어 하셨어요. 코로나가 걷히는 대로 무대에 올라 팍팍한 세상을 따뜻하게 해주는 노래를 많이 부를 겁니다.”